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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장애를 극복한 분들 3

야국화 2008. 4. 13. 20:32

◇ 중국 최대의 역사가 사마천


사마천에 대한 자료는 매우 희박하여 자세히 기록하지 못했다. 그는 B C 145-86년까지 살다간 중국 전한시대의 역사가이다.  자는 자장(子長). 부친 사망 후 그 뒤를 이어 태사령(太史令)이 되었다.  기원전 104년 공손경 등과 함께 '태초력(太初曆)' 재정하여 후세 역세(曆歲)의 기초를 이루었다.


기원전 98년 한나라 장군 이능이 흉노에 항복한 것을 변호하다가 천자의 분노를 사서 궁형에 처해 있다가 2년 후 출옥하여 중서알자령이 되었다.  그가 평생동안 저술했다고 알려진 '사기(史記)'는 동양최고의 역사서로 평가되고 있다.



◇ 악성 베토벤


베토벤은 독일이 낳은 역사상 최고의 작곡가로 고전파 음악의 완성자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모두 음악가였던 만큼, 그는 어려서부터 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 열 네 살 때 궁정 예배당의 오르간 연주자로 임명되었다. 그 후 열 일곱 살에 빈에서 온 발트시타인 백작의 추천으로 빈에 가서 하이든으로부터 음악을 배웠다. 그는 대단한 노력가였고, 겉으로만 아름답고 화려한 것은 싫어했으며 마음속의 감동을 중시하였다.


그러다 스물 여섯 살 때 병을 앓아 마침내 귀가 들리지 않게 되었으며, 서른두살 때는 유서를 쓰고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그 괴로움을 극복하고 힘차게 살아갔기 때문에 그의 음악은 귀를 즐겁게만 하는 것이 아니라 듣는 사람에게 깊은 감동을 주는 대예술로 전해져 오는 것이다. 그가 청각장애인이 되고 난 후 작곡한 불후의 명곡 교향곡 9번 '합창'을 들어보라! 그것은 귀로 듣는 음악이 아니라 가슴으로 듣는 음악이다.



◇ 낭만파 시인의 대명사 바이런


영국의 세계적 시인인 바이런은 1788년부터 1824년까지 살았다. 그는 런던의 귀족 집안에서 출생, 어려서부터 훌륭한 글재주로 주위의 칭찬을 받으며 성장했다.  켐브리지대학에 입학하여 역사와 문학을 전공했다.


1807년 '게으른 날들'을 발표했으나 평판이 좋지 않았고, 졸업한 뒤 무질서한 생활을 계속하다 유럽을 여행하다 돌아와 견문기 '차일드 헤럴 등의 편력'을 출판하고서 일약 유명해졌다.  계속하여 '해적', '라라', '돈환' 등 유명한 작품을 계속 발표, 19세기 낭만파의 대표적인 존재가 되었다.


항상 그리스 문화를 사랑했던 그는 23년 그리스 독립전쟁에 참여해 독립군에게 사기를 북돋아 주었는데 '오늘 나는 36세가 되었다'는 시를 마지막으로 말라리아 병에 걸려 사망했다. 그는 다리를 절었으나 언제나 자기 자신을 노래하고 생각하는 시를 쓴 시인으로서 자유롭게 살다 간 낭만주의자였다.




◇ 시각장애 수영선수 타마스 다르니


1988년 서울올림픽대회는 그 어느 때보다 장애인 선수들이 많았다. 헝가리의 타마스 다르니 선수는 수영에서 금메달을 땄는데 그는 시각장애인이다. 15살 때 친구가 던진 눈덩이가 왼쪽 눈을 강타한 것이 다르니에게 실명을 가져다 주었다. 7차례나 수술을 했지만 다르니는 왼쪽 눈이 움푹 파인 상처가 남아있다. 다르니는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도 금메달을 획득하여 2연패를 했다.



◇ KO승으로 재기에 성공한 의족복서 크레이크


의족의 복서가 KO승으로 재기해 미국 스포츠팬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그 화제의 인물은 크레이크 보자노프스키. 그는 오토바이 사고로 우측다리를 전달, 재기불능의 판정을 받았다. 다리를 다치기 전만 해도 그는 13전 전승 무패를 자랑하는 촉망받는 권투선수였다. 그러나 그는 절망을 딛고 고무로 된 의족을 하고 다시 권투에 도전 교통사고 후 18개월만에 의족의 복서로 재기한 것이다.  프로데뷔 14연승을 올린 그는 "장애인들에게 용기를 줄 수 있게 돼 한없이 기쁘다.  나는 오늘의 승리보다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긴 것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고 말했다.



◇ 짧은 다리의 금메달리스트 조아큄 크루즈


LA올림픽 육상 800m에서 금메달을 딴 브라질의 조아큄 크루즈(21세)선수도 장애를 극복한 올림픽 영웅이었다. 크루즈는 태어날 때부터 오른쪽 다리가 2cm나 짧아 다리를 저는 장애인이었다. 그래서 그는 특별히 고안해서 만든 특수 운동화를 신고 뛰었다. 그는 수술만 하면 정상인이 될 수 있었지만 집안 형편이 몹시 어려워 수술은 커녕 병원 한 번 가보지 못하고 자랐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구두닦이와 껌팔이를 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던 그가 운동을 시작한 것은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서였다.


처음 시작한 운동은 농구였다.  다니던 초등학교 농구 코트에서 절룩거리며 던진 볼이 링그물에 출렁거리는 것을 보고 배고픔을 잊곤 했다.  크루즈는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부터 달리기를 했는데 이 역시 배고픔 때문이었다. 그는 "운동을 하고 나면 더 허기가 왔지만, 달리는 동안은 배고픔을 느끼지 않아서 계속 달렸다"고 했다.


그의 달리기를 지켜 본 학교 체육 교사 올리베이라씨는 그가 불편한 다리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육상선수가 될 수 있다는 판단에서 직접 지도를 하여 정상의 길에 오르게 했다. 올리베이라씨 밑에서 맹훈련에 들어간 크루즈는 급격히 기록 향상을 보여 17살 때 400,800,1500m에서 남미 신기록을 세우며 육상 스타로 떠오른 것이다.


LA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고 나서 크루즈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첫 번째로 나의 조국 브라질에 금메달을 바치다니 꿈만 같다.  나는 매우 행복하다.  오늘 영국의 세바스찬 코 등 세계적인 강호들을 꺾고 우승했다.  나는 더욱 정진, 꼭 세계 기록을 갱신하겠다.' 크루즈는 비록 가난하지만 모 방송국이 2만 5천달러짜리 주택을 제공하겠다는 제의에 '그 돈으로 차라리 육상장이나 건설하라'고 한마디로 정중히 거절했고, 또 '카 퍼레이드 따위의 환영은 사양한다.'고 해서 그의 인간성을 돋보이게 했다.



◇ 메이저 대회 우승을 차지한 청각장애인 여자 골퍼 마르타 노스


미국 메이저 골프대회인 드 모리어클래식서 우승을 차지한 청각장애인 여자 골퍼 마르타 노스. 그녀는 지난 92년 귀신경을 다쳐 골프를 할 수 없다는 판정을 받았으나 불굴의 의지로 재기, 우승을 차지했다.  그녀는 우승이 확정된 순간 소감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의사들은 거짓말쟁이였다."며 2년 동안의 병마와 고통을 이겨내고 얻은 승리의 기쁨을 만끽했다.

 

지난 78년 프로에 데뷔, 지금까지 통산 2승밖에 올리지 못했던 그녀가 청각장애인이 된 후 오히려 메이저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것은 시련에 부딪칠수록 강해지는 인간의 강인한 면모를 다시 한 번 느끼게 하는 사실이다.



◇ 전설의 복서 무하마드 알리


전설적인 복싱영웅 무하마드 알리가 제2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선수생활때 입은 펀치드렁크의 후유증으로 파킨슨병을 앓고 있는 알리가 전세계 장애인들의 희망으로 부각되면서 상담과 위문활동, 강연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미시간주 작은 마을에 은거하고 있던 알리가 갑자기 부상한 것은 지난해 7월 '96애틀란타올림픽 개회식 때, 성화 최종주자로 선정된 알리가 온몸에 스며든 병마로 인해 뒤틀리는 몸을 버텨내며 성화에 점화하는 모습은 전 세계인들의 감동을 자아냈고 특히 동병상련의 장애인들에게는 희망을 심어 주었다.


올림픽이 끝나고 그의 집에는 매일 수백 통의 전화가 걸려와 "당신 덕에 희망을 갖고 살게 됐다."며 감사의 뜻을 전하고 있다. 유에스에이투데이지가 소개한 한 일화는 같은 장애인들에게 그가 우상으로 자리잡았음을 보여준다.

 

어떤 여자가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당신은 내 남편에게 영감을 주었다. 죽는 날만을 기다리고 있던 남편이 요즘 거리에서 나도 알리와 같은 파킨슨병 환자"라고 외치고 다니며 삶의 의욕을 보이고 있다고 전화를 한 것이다. 상황이 이쯤 되자 알리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알리는 불편한 몸을 이끌고 이곳저곳을 누비며 '희망의 전도사'로서 활약하고 있다.

 

그러나 알리는 장애인들이 아닌 굵직한 스폰서들이 요청하는 강연에는 상당한 몸값을 요구하고 있다. 행사장에 하루 모습을 나타내는데 10만달러(약 8천 2백만원) 외국으로 나갈 때는 최소한 22만 5천달러(약 1억 8천 4백 50만원)을 받고 있다. 알리는 마비된 근육을 힘들게 움직여 사람들에게 말한다. "내가 성화에 점화할 때 왜 울었죠? 나도 했는데 여러분은 왜 못합니까. 뭐든지 포기하지 마세요."



◇ 소아마비 육상선수 루돌프


1960년 로마 올림픽에서 3개의 금메달을 휩쓸었던 미국의 여자 육상 선수 루돌프는 소아마비 장애인이었다. 그녀는 여자 100m,200m 그리고 400m 릴레이에서 3개의 금메달을 목에 걸어 3관왕의 영웅이 되었다.  루돌프는 그로부터 24년 지난 LA올림픽대회에 육상 경기 방송 해설자로 모습을 드러냈는데 그녀의 얼굴에서 세월의 흐름을 느낄 수가 있었다.

 

루돌프는 한 인터뷰에서 이런 고백을 했다. "내가 월계관을 썼을 때, 나는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했습니다.  황홀했어요.  그러나 나에겐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었어요. 프로로 전향한 클레이는 억만장자가 됐지만 나한테 돌아온 것은 연봉 4천 달러의 국민학교 체육 교사 자리였어요. 하지만 그건 대가족의 생계를 꾸려 나가기엔 너무나 박봉이었어요. 결혼도 두 번이나 실패했지요. 첫 번째 결혼은 내가 금메달을 따고 난 직후였어요. 남편은 내가 금메달리스트라는 그 이유만으로 나와 결혼했지요. 그 남자는 나를 이용해서 부자가 되는 꿈을 꾸었던 거예요. 결국 금메달도, 인생의 목표로 생각했던 결혼도, 얻은 그 순간일 뿐 영원할 수 없었어요."

 

현재, 그녀가 손수 지도하는 학생은 4백여 명으로 루돌프 자신이 경험했던 '영광에의 집착과 대중에 의한 자신의 망각 같은 시행 착오를 절대로 후진들에겐 남겨 주지 않을 것' 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 두 팔 없는 미식축구선수 로니 웨스트


두 팔이 없는 장애를 딛고 미식축구선수가 된 로니 웨스트가 살아온 4반세기의 삶은 끊임없이 자기와의 싸움이었다. 그는 어머니의 약물복용으로 태어날 때부터 두 팔이 없이 태어났다. 그러나 그는 그런 장애에도 불구하고 여섯 살 때부터 수영을 하여 10년간 장애인 체육대회에 출전했으며, 미식축구사상 처음으로 두 팔이 없는 미식축구선수가 되었다.

 

장애인수영대회에서 5개의 세계기록을 보유한 웨스트는 "나는 두 팔이 없다. 그렇지만 스포츠를 좋아하며 내 스스로 만능 스포츠맨으로 자부한다."라고 거침없이 말한다. 미식축구선수가 쉽지만은 않았다. 포지션이 키커라고 했지만 가끔 태클을 해야 했고 필드골 시도도 봉쇄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를 가장 괴롭히는 것은 역시 팔 없는 장애인을 키커로 내세웠다는 상대선수들의 비난이었다.


그의 동료들은 그에게 격려를 아끼지 않았으며, 그는 경기를 거듭할수록 자신감을 가졌다. 그는 "이 세상에는 왼손잡이가 많이 있는데 나는 왼발잡이다."는 농담도 하는 자신에 찬 삶을 살고 있다. 


출처 : 가로세로 아동발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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