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메달 열 개의 소아마비 선수 레이 유리
올림픽 사상 가장 많은 금메달을 차지한 선수는 소년 시절을 휠체어 위에서 지낸 장애인이었다. 1873년 미국 인디애나 주에서 태어난 레이 유리는 소아마비에 걸려 휠체어 위에서 지내다가 10살때부터 몸을 단련하기 시작했다. 달릴 수 없었던 유리가 할 수 있는 운동이란, 서 있는 자세에서 껑충 뛰어오르는 일이었다. 당시에 올림픽 종목에는 선 자세에서 치뜨는 높이 뛰기, 넓이 뛰기, 세단 뛰기가 있어 유리의 희망을 키워 주었다.
1900년 파리. 제2회 올림픽에 26살의 나이로 출전한 유리는 이 3개 종목에 우승했고, 1904년 세인트 루이스에서의 제3회 대회에서도 역시 이 3개 종목을 모두 2연패했다. 그리고, 중간 대회(1906년 아테네)와 그로부터 2년 뒤인 1908년의 제4회 런던 대회에서도, 종목이 없어진 선 자세에서의 세단뛰기를 제외하고, 나머지 2개 종목에서 각각 우승함으로써 연속해서 금메달 10개를 차지했다.
◇ 금세기 최고의 절단장애 여자스키선수 다이애나 골든
한쪽 다리를 절단한 불행을 딛고 미국 최고의 여자 스키선수로 우뚝서 세계인들을 감동시켰던 다이애나 골든. 그녀는 장애를 극복하고 일어선 인간승리의 화신으로 오랫동안 전세계 매스컴들의 칭송의 대상이 돼 왔으며 그녀의 스토리는 '스키에의 재도전'이란 제목으로 영화화 돼 우리 안방극장에도 소개된 적이 있다.
미국 매사추세츠주 링컨태생으로 다섯 살 때부터 스키를 타기 시작한 다이애나는 열두 살때인 75년 골수암으로 오른쪽 다리를 잘라내야 했으나 각고의 노력으로 설원에 다시 돌아와 비장애인들도 넘보기 힘든 놀랄 만한 활약상을 보였다.
외발스키로 슬로프에 다시 선 그녀는 82년 첫 출전한 세계장애인선수권대회에서 첫 금메달을 목에 건 이래 미국 장애인스키선수권대회를 10차례, 세계장애인스키선수권대회를 19차례나 석권했으며, 88년 캘거리 동계올림픽에서 시범 종목으로 채택된 장애인 대회전에서 우승 등 장애인 스키부문의 독보적인 존재로 군림해 왔다.
그녀는 장애인용 장비가 아닌 일반 장비로 이러한 성적을 올려 86년 미국스키협회가 매년 최우수선수에게 주는 베크상을 받았으며, 88년에는 '스키 레이싱'지에 의해 올해의 알파인 여자스키선수로 뽑혔다. 그리고 같은 해에 정상인 스키선수들을 제치고 미국 올림픽위원회로부터 '올해의 여자스키선수'로 지목되는 영광을 누렸다.
그녀는 자신에게 따라 다니는 '용기있는'이란 수식어를 혐오한다. 그 단어가 모든 장애인들의 능력을 얕잡아 보는 그릇된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이애나의 스토리는 과장해서 말하기 좋아하는 미국인들 사이에서는 이미 하나의 전설로 떠받들어지고 있다.
◇ 영혼의 목소리 호세 펠리치아노
시각장애인 가수 호세펠리치아노는 원래 푸에르토리코의 빈농의 아들로 미국에 이민 와 뉴욕의 스페인 이민촌 빈민굴에서 성장했다. 어릴 적부터 아코디언과 기타를 치기 시작한 그는 일반 시각장애인들이 앞을 못 보는 대신 다른 감각이 발달해 있듯이 그 역시 천부적인 음악소질로 인해 매우 빠른 음악적 성장을 거듭해 열 일곱 살 때부터 공연을 다니기 시작했다.
그가 레코드로 데뷔한 것은 1963년부터였다. 물론 처음에는 그의 노래 대부분이 스페인어였기 때문에 라틴 아메리카 쪽에서 인기가 있었고, 그가 정작 미국에서 그의 이름을 드날린 것은 1969년 팝챠트 3위까지 오른 그룹 DOORS의 히트곡을 터뜨리기 시작하는 그는 TV 인기시리즈 주제가와 영화음악 등으로 인기의 절정에 오른다. 그는 현재까지 30여년 넘은 가수생활 동안 레코드 발표, 그리고 끊임없는 순회공연으로 정력을 과시하고 있다.
그는 시각장애인임에도 불구하고 못 다루는 악기가 없으며 일반가수들보다 훨씬 뛰어난 영혼의 노래를 마음껏 부르는 가수이다. 그리고 자신이 장애인이면서도 많은 자선사업을 하면서 비장애인들보다 훨씬 행복한 삶을 사는 사람이다. 앞서 소개한 레이찰스나 스티비 원더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호세펠리치아노는 가슴을 울리는 영혼의 목소리로 우리의 일상을 깨워 그의 행복한 세계로 불러들인다.
◇ '비밥바 룰라'의 주인공 진 빈센트
'비밥바 룰라'란 노래로 록큰롤 세대를 풍미하며 세계적인 스타급 가수로 부상한 진 빈센트는 한국전에 참전했다가 장애인이 되어 고통 속에 살다가 세상을 떠난 불세출의 팝가수로 남겨졌다. 열여덟 살의 어린 나이에 진 빈센트는 미해군에 입대, 한국전에 투입됐다. 그러나 그는 불행하게도 한국전쟁이 휴전으로 치닫던 1953년 사고를 당해 다리를 크게 다쳤다.
장애인이 된 채로 한국전에서 전역했을 때 그는 건강문제로 고통을 받으면서도 록큰롤 가수로서의 새 출발을 위해 그룹을 결성하는 등 눈부신 활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는 그런 결과 1956년 6월 빌보드 팝싱글챠트 7위에 올라 세계적인 스타가 된다. 그는 그 이듬해까지 모두 6곡을 인기챠트에 올렸다.
그러나 진 빈센트의 불운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는 1959년 방송 DJ에게 뇌물을 주고 자기 노래를 선전했다는 비난 속에 미국을 떠나 영국에서 유배생활을 해야만 했다. 그는 1960년 영국에서 활동을 시작하면서 동료와 차를 타고 달리다 런던 교외에서 대형 교통사고를 당해 동료는 그 자리에서 숨지고 자신은 중상을 입었다. 이 사고 이후에도 그는 7년 이상 영국서 활동했지만 결국 자신이 장애인이라는 사실과 위궤양에 화병까지 겹쳐 1971년 10월 1일 궤양출혈로 한많은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 중국 최대의 병법가 손자
손자는 B C 6-5세기경 중국 전국시대의 제나라 병법가이다. 이름은 무(武), 자(子)는 존칭이다. 절도와 규율로 오나라의 군대를 양성하였으며 병서인 '손자'를 지었다. 그의 병서는 유교사상에 입각한 인의를 전쟁의 근본이념으로 하였는데 거기에는 전쟁의 전술만이 아니고 제후의 내치, 외교, 국가경영의 비결, 승패의 비기, 인사의 성패 등에 대해서도 비범한 견해를 나타내고 있다.
그의 뛰어난 전략은 후세의 무장들 사이에 널리 이용되었다. 우리 나에도 일찍이 소개되어 애독되었으며 조선시대에는 한 때 역과 초시(譯科 初試)의 교재로 쓰였으며 최근에는 소설로도 소개되어 널리 읽히고 있다. 그는 두 다리가 절단된 중증장애인이었다고 한다.
◇ '작은 신의 아이들'의 청각장애인 배우 말리 매틀린
지난 87년 '작은 신의 아이들'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청각장애인 배우 말리 매틀린의 인기가 식을 줄 모르고 있다. 빼어난 미모와 탁월한 연기력으로 첫 작품 '작은 신의 아이들'의 농아 주인공 사라역을 훌륭히 해내 전세계 영화인은 물론 장애인들의 찬사를 받았다.
평소 "나는 농아배우가 아니라 배우이면서 동시에 농아인 한 인간"임을 강조해 오던 그녀는 출연작마다 비장애인을 넘는 탁월한 연기실력으로 '농아'아닌 진정한 배우임을 일깨워 왔다. '작은 신의 아이들'에 이어 그녀는 두 번째 영화 '워커'에 출연했고, 미장원에서 농아특수학교에 필요성을 역설하며 특수학교 보호입안을 요구하기도 했다. 배우이면서 동시에 농아들의 권익에 앞장서는 사회사업가의 역할도 한 것이다.
◇ 발명왕 에디슨
에디슨은 오하이오주 미란에서 태어난 발명가로 그의 발명은 매우 많아서 특허가 1,300여가지나 되는 발명왕이다. 우리 주위에는 그에 의해 발명된 것이 많다. 축음기(1877), 영화(1888), 자동발신기(1874), 전화송신기(1879), 전차의 실험(1881), 발전소(1882)등이 있다. 그리고 에디슨 효과의 발견은 3극 진공판 발명의 기초가 되어, 라디오 발명의 길을 열어 준 과학에서의 중요한 발견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에디슨은 집안이 무척 어려웠기 때문에 학교 교육을 받은 것은 겨우 3개월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철도의 신문팔이 일을 하면서 열차 안에서 열심히 공부를 했다. 그러다 열 다섯살 때 역장 아들의 목숨을 구해준 것이 인연이 되어, 전신술을 배워 전신 기사가 되었다.
이 무렵에 전기학을 공부하여 발명의 토대가 되는 지식을 얻어 1870년경부터 여러 가지 발명을 시작하게 되었다. 1876년에는 멜론 파아크에서 자기의 연구소를 만들어 참을성 있게 꼼꼼히 연구를 계속하면서 그는 '천재라는 것은 98%의 땀과 2%의 영감'이라는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이 말에서 우리는 에디슨이 소리가 잘 안 들리는 자신의 핸디캡을 오히려 깊이 몰두할 수 있는 연구심으로 바꾼 피나는 노력가였음을 알 수 있다.
◇ 매일 특수 악보와 싸우는 시각장애인 와나미
시각장애인이란 부가적 조건 때문이 아니라 순수한 음악성으로 세계적 명성을 누리는 바이얼니스트 와나미는 태어날 때부터 시각장애인이었다. 4살 때부터 바이얼린 수업을 시작한 그는 열 일곱 살 때인 1962년 일본 최고의 등용문인 마이니찌신문 콩쿠르에서 대상을 받았고, 스무 살 때 콘티보 국제 콩쿠르에 입상하면서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1년 중 6개월 이상을 해외 연주활동으로 보내는 그는 88년 서울 장애자 올림픽 때 기금마련을 위해 서울 공연을 갖기도 했다. 일본에서는 음악적 명성에 못지 않게 그의 어머니가 쓴 '어머니와 아들의 심포니'란 책으로도 유명한 그는 항상 모든 것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바이얼린을 켠다고 한다.
◇ 소아마비 바이얼리니스트 이자크 펄만
준수한 이목구비, 훤칠한 외양도 지니지 못했으나, 현재 온 세계를 통틀어 가장 소중한 바이얼리니스트인 이자크 펄만, 그는 소아마비 장애인이다.
몇 년 전 그는 테너 플라시도 도밍고와 함께 "Together"란 타이틀의 음반을 만들었는데, 도밍고의 멋진 노래들을 바이얼린으로 받쳐주는 그의 연주로 완벽한 앙상블을 이뤄냈다. 그는 1945년 이스라엘에서 태어나 1958년 미국으로 이주했다. 열세살 때 유명한 텔레비전 쇼에 소개되면서 유명세를 치르기 시작한 이래, 줄리아드 음악원을 졸업했고, 1964년 메벤트리트 콩쿠르에서 우승하면서 명성은 절정에 달했다.
연주자로서 다리가 불편하다는 것은 안타까운 사실이지만 그는 신체장애인으로서 얻는 프리미엄은 단연코 거절한다. 그는 그의 연주가 연주 그 자체로 평가되기만을 원한다. 그는 이점에 대해서 "사람들은 누구나 내 연주만을 갖고 나를 평가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나는 두 번의 부자유를 겪게 되는 것이지요"라고 말한다. 활달하고 환하게 웃는 것을 좋아하는 그는 앞으로도 뛰어난 앙상블 연주자로서 이름을 남길 것이다.
◇ 미술계의 거장 알렉세이 야블렌스킨
개성적인 양식으로 미술사에 한 획을 그은 러시아 출신 화가 알렉세이 야불렌스키. 1864년 러시아에서 출생한 그는 1896년 이후 미술계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10년동안 왕성한 작품활동을 하며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을 여행했고 고갱, 세잔느, 반 고호, 마티스의 영향을 받아 개성적인 양식을 발전시켰다.
1929년부터 그는 무서운 병마에 시달리는데 통증 때문에 움직이지도 못하면서 두상 시리즈인 '명상'을 완성하였고, 그후 관절염으로 인한 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나치는 그를 퇴폐미술가로 몰아붙이기도 했으나, 야불렌스키는 자신만의 독특한 조형성을 구축한 미술계의 거장으로 지금도 기억되고 있다.
◇ 유럽 최고의 시성 시각장애인 호메로스(호머)
호메로스는 그리스의 서사시인이다. 그는 서구문학의 조종(祖宗)이며, 그리스 최대의 시성이라 평가된다. 그의 생애에 관해서는 유명한 대서사시 '일리아스'와 '오딧세이아'의 작자라고만 알려졌을 뿐이다. 일설에는 개인이 아니고 편력시인의 집단명이라고도 하고 또는 실재하지 않은 전설적인 인물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크세노파네스, 헤로도토스 등의 확실한 증거 및 근대의 역사학문, 고고학적 발견과 연구 및 언어학상의 조사연구에 의하면 그는 실제의 인물로서 소아시아 이오니아 해변 스미르나의 출생으로, 시각장애인이었다고 한다. 태어난 연대는 B.C 900 - 800년경이다.
출처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미국의 32대 대통령)
갑작스럽게 찾아온 소아마비를 딛고 링컨과 함께 미국 최고의 대통령으로 남는 인물이죠.
부유한 가정에 때어나 풍족한 환경에서 자랐고 젋은 나이때부터 사람들로부터 앞날이 촉망되는 미래의 정치가로 각광을 받았습니다. 1920년엔 39세의 젋은 나이로 민주당 부통령 후보까지 선출이 되는등 탄탄대로의 인생길을 걸었음. (당선이 되지는 못했음) 그러다 1년후에 휴양중 호수에서 수영을 하고 난 뒤 고열과 전신 통증을 격게됩니다.
루스벨트를 치료하러 온 의사는 루스벨트의 병을 척수 손상으로 오진을 하고 그의 아내에게 강한 안마를 귄합니다. 사실 루스벨트의 증상은 소아마비였고 의사의 안마 처방은 그 증상에 최악의 치료법이었음. 이 오진으로 루스벨트는 회복이 불가능해지고 하반신이 마비가 되어버리게 됩니다. 그덕분에 무거운 쇠 보호대 없이는 걷지도 못했고 부축 없이는 서 있지도 못할정도 였음 그럼에도 루스벨트는 포기하지 않고 그의 아내의 헌신적인 도움을 받으면서 7년동안 재활치료를 받습니다.
그 기간동안 루스벨트는 큰 인간적 도약을 이루게 됩니다. 루스벨트의 젋을때의 부유한 환경은 그를 대중과는 거리가 먼 삷을 살게하였지만. 소아바미를 통해 그는 전에 없던 정신력과 용기를 갖게 되고 삷이 근원을 생각하게 되괴 무한한 인내와 의지라는 중요한 가르침을 얻게됩니다. 소아마비로 인한 신체마비를 어느정도 극복하고 혼자서 대중연설을 할수있게 되자 그는 다시 정계에 도전을 하여 1928년엔 뉴욕주지사에 당선이 되죠. 당시 미국은 대공황으로 인해 1 명중 4명이 실업자로 살고 있었음.(IMF때 우리나라 실업율이 두자리도 안된걸 생각하면 엄청난 숫자임). 루스벨트는 당시 앞장서서 실업자들을 위해 일자리와 복지사업을 재공하였고 그 정책들로 인해 그는 1932년에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이 되고 결국 당선이 됩니다. 그의 취임연설에서 루스벨트는 "우리가 두려워할것은 우리 자신안의 두려움밖에는 없습니다"라는 유명한 연설로 국민들에게 희망을 불어넣었습니다.
루스벨트는 대공황과 2차대전이라는 국난동안 4선 임기를 치뤘고 그동안의 루스벨트의 수많은 업적들 가운데 중대한 몇 가지를 꼽자면 뉴딜정책과 미국 경제 회복, 소외 계층 밎 장애인을 위한 복지, 인디안 보호정책등을 들 수 있는데 이것들은 루스벨트가 장애를 통해 시달리는 민중들의 아픔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죠. 그는 이차대전동안 미국을 일본과 독일을 상대로 승리로 이끌었고 국제연합을 창설합니다. 대통령으로써 12년간동안 엄청난 피로가 누적되었고 1945년에 임기중 뇌졸증 발작으로 사망하게 됩니다. 루스벨트가 대통령이 되었을 당시 미국은 대공황으로 국가가 절망적인 상황이었고 대외적으로는 독재국가들이 판을 치고있었죠. 그가 사망했을 당시에는 미국이 세계초강대국이 되어있었습니다. 루스벨트는 대통령이었을 당시에 자신을 장애인으로 만들고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고통속으로 몰아넣은 소아마비를 정복하겠다는 인생을 목적을 이룩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1938년에 마치 오브 다임스라는 재단을 창설하여 소아마비 예방접종연구개발을 본격적으로 지원합니다. 그리하여 1955년에 결국 소아마비 예방접종이 개발이 이뤄지게 됩니다.
'도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장애를 극복한 분들 2 (0) | 2008.04.13 |
---|---|
[스크랩] 장애를 극복한 분들 3 (0) | 2008.04.13 |
박사가 사랑한 수식 (0) | 2007.10.19 |
도서목록 추천 사유 (0) | 2007.03.29 |
중학생이 읽어야 할 도서목록 (0) | 2007.03.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