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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의 목적과 역사 1

야국화 2015. 8. 31. 15:42

학문의 목적과 역사 1
임번삼
명지대학교 외래교수
전 대상그룹 식품당당 대표이사
한국창조과학회 이사

1. 학문의 목적은 무엇인가?


  사람은 생각하는 존재이다(Homo sapiens). 그러나, 연약한 존재이기에 파스칼은 생각하는 갈대(thinking reed)라 하였다. 인간은 어떤 존재일까? 왜 태어나 살며, 사는 동안 왜 고통은 끊이지 않고, 결국은 죽는 것일까? 죽음은 무엇일까? 죽은 후에 천당과 지옥은 있을까? 그리고, 인간을 심판한다는 신은 정말로 존재할까? 우주만물은 어떻게 생긴 것일까? 우주와 인간 사이엔 무슨 관계라도 있는 것일까? 간단하게는 얻을 수 없는 이러한 질문들을 수없이 되뇌이며 우리 조상들은 살아 왔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람들의 최대 관심사는 자연과 인간에 대한 것이었다. 그래서, 학문의 출발지라는 그리스에서는 자연(동물, 식물, 광물, 우주, 인간)에 대하여 연구하는 자연철학(natural philosophy)이 곧 학문의 출발점이었다. 자연철학은 자연의 기원과 존재 및 그 운행원리(변화, 운동, 소멸)에 대해 연구하고, 거기서 얻은 지식(sophia)을 사랑하여(philia) 학습하는 행위를 일컫는 말이다. 그러한 연구로 얻은 지식은 동물지(動物誌 animal history), 식물지(植物誌 plant hitsory), 광물지(鑛物誌 mineral history), 자연지(自然誌 natural history), 존재론(存在論 ontology) 등의 이름으로 기록되어 전해 내려온다.


  자연철학은 중세 말에는 자연의 역사에 대해 연구하는 박물학(博物學 natural history)으로, 근세에는 여러 갈래로 분과된 학문(分問), 즉 과학(科學)으로 그 이름을 바꾸었다. <과학>(science)이라는 말은 라틴어의 지식(scientica)에서 유래한 것으로, 지금은  자연과학(natural science), 인문과학(cultural science), 사회과학(social science)으로 나누고  있다. 브리타니카는 무생명체를 다루는 물리과학(physical science), 생명체를 다루는 생물과학(biological science), 인간사회를 다루는 사회과학(social science), 및 통합과학(combined science) 등으로 나누고 있다. [Britanica Encyclopedia, S-Sound, Vol. 22, pp 61-61e, 1974]  이처럼, 학문이란 배우고 익히는 것(learning)이며, 그러한 노력의 결과로 얻어진 체계화된 지식(science)을 일컫는 말이다.


  선인들은 학문의 목표가 자연과 인간의 본질을 규명하는 데 있다고 하였다. 달리 말해서 학문의 목적이 진리의 탐구라는 말이다. 그런데, 진리란 무엇이며, 실제로 존재하는 것일까? 이러한 물음은 매우 기본적이면서도 궁극적인 질문이기도 하다. 나는 학문의 목적이 진리의 탐구에 있으며, 영원불멸의 진리는 하나뿐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이 글을 통하여 그것을 나타내고자 한다. 따라서, 이 글은 단순히 ‘지식에 지식을 더 하려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실체가 자연스럽게 드러나도록 소개하려는 데 촛점’을 맞추려 한다. 이러한 기술자세에는 주관이 개입될 소지가 많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주관적이긴 하나 내 나름대로는 학문적 객관성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시중에 나도는 대부분의 고전들도 내용적으로는 저자들의 주관적 시각으로 일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주관이 어떤 면에서는 차별성과 독창성(distinction & originality)을 제공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학문이란 그러한 개성있는 주장들이 다양하게 제시되면서 논쟁하며 발전해 가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오늘날의 학계에서는 실험적으로 증명되지 않은 진화론이 흡사 실증된 이론인 양 자연과학의 이름으로 가르쳐지고 있는 것은 우려할만한 일이다. 본인이 본서를 기술하게 된 동기는 진화론의 오류들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인류사에 끼친 해악이 너무나 컸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서는 생명과학의 주제들에 대하여 진화론적 견해를 먼저 소개한 후, 이에 대한 창조과학적 비판을 병기하여 두 이론을 비교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창조론적 시각이 현대과학의 논리에 더욱 부합함을 많은 자료를 인용하여 설명하였다. 이 책을 쓰면서 나는 진리를 찾는 길이 얼마나 어렵고 험난한 가시밭길이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진리가 불의한 세력에 의해 가리워져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러면, 지금부터 독자 여러분과 같이 타임캡슐을 타고 우리 선조 아담이 잃어버린 생명나무의 행방을 찾아 과거의 세계로 떠나 보기로 하자.



2. 진리란 무엇인가?


(1) 철학, 과학, 사상, 종교의 관계


  사람들은 옛날부터 진리를 찾느라 노력해 왔으나, 진리는 베일 속에 제 몸을 감춘 채 나타나기를 거부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수많은 현인들이 진리를 찾아 헤메었으나, 뚜렷한 해답을 얻지 못한 채 지금까지도 구도행렬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절망하였고, 부질없는 짓이라 자포자기 했으며, 어떤 이들은 자신이 깨달은 내용이 진리라 속단하고 사람들을 오도(誤導)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양상은 동서양의 역사를 통하여 유사하였다.


  인간이 진리를 찾는 방식은 종교와 철학 및 사상의 형태로 나타났다. 종교의 주된 관심은 우주의 기원(起源)이 무엇이며,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하는 두 명제에 집중된 것이었다. 종교(宗敎 religion)는 절대자와 내세관에 대한 믿음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반하여, 철학은 절대정신을 가지고 있으나 내세관을 필수조건으로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종교와 구별된다.


  종교에서 말하는 절대자(絶對者)란 만물을 창조하고 자연법칙을 만든 초월적 존재이거나(人格神論), 우주법칙 자체(汎神論)를 의미하기도 하였다. 전자에는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가, 후자에는 힌두교, 불교, 도교를 비롯한 거의 모든 종교들이 속한다. 유교는 절대정신(仁)을 가지고 있으나 내세관이 없으므로 종교라기보다는 사상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내세관(來世觀)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것이므로 믿음이 전제되어야 한다. 믿음은 과학적으로 실험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따라서, 종교는 실험과학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러나, 학문의 궁극 목표인 진리를 탐구하려면 실험과학만으로는 한계를 지니게 되므로, 종교의 도움이 필수적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실험과학과 종교는 경쟁 아닌 보합적이고, 표리적인 관계라 할 수 있다.


  자연과 인간에 대하여 철학(哲學 philosophy)은 이성(理性)을 통하여 객관적이며 분석적으로 접근하려는 데 반하여, 사상(思想 thought)은 주관적인 추론이나 감성적(感性的) 인 직관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세계관이라 할 수 있다. 헤겔(Hegel)은 일찍이 서양에서는 철학이 발달한 반면, 동양에서는 철학(학문) 보다는 사상이 발달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아울러, 철학은 후일 학문으로 발전할 수 있었으나, 사상은 객관성의 결여로 학문화되지 못했다고 비판하였다. [甲田 烈, 山本伸裕; 哲學, pp 20-37, Kanki Publishing Co, 東京, 1999]


  논리성과 객관성을 필수조건으로 하는 철학은 후일 서양에서 자연과학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특히, 과학의 혁명기(15-16C)와 계몽주의(啓蒙主義 Philosophy of Enlightment) 시대를 거치면서 철학은 ‘관찰과 실험’에 의한 실증적인 분야로 더욱 세분화되었다. 이에 따라, 종합적 성격의 철학이라는 이름의 학문은 인문과학, 사회과학, 자연과학으로 나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세분화 된 과학은 학문본연의 목적인 진리를 규명하기에는 뛰어 넘을 수 없는 한계를 스스로 지니게 되었다. 전문화는 되었지만 부분적이기에 가지는 한계성인 것이다. 이러한 한계성을 인문과학의 한 분야로 전락한 근세철학에서는 직관(直觀)과 자기비판(自己批判)으로 해결하려 하였던 것이다. [Okuyama Minoru; 基督敎界ニ ォケル 創造ニ 關スル 異ナル 見解, pp 3-4, 創造ニ 關スル 一日セミナ, Ochanomizu Center, Mar. 20, 東京, 1993].


   이상에서 보았듯이, 진리를 찾으려는 인류의 노력은 세 가지의 형태로 나타났음을 알 수 있다. 즉, 사상은 감성과 주관으로, 철학은 이성에 의해 논리적으로, 그리고 종교는 믿음으로 접근하였던 것이다.



(2) 동양의 구도활동


  동양에서는 옛날부터 진리를 도(道)라 하였고, 많은 선인들이 그것을 찾아 헤메었다. 도를 깨달은 사람은 성인과 현인으로 추앙받았으며, 그들의 가르침은 종교의 형태로 후계자들에게 이어졌다. 그들이 깨달았다는 대표적인 사례를 소개한다.


  동양에서 정신적 유산을 가장 많아 남긴 곳은 인도라 할 수 있다. 고대인도에서 발흥했던 브라만교(Brahmanism)의 경전인 우파니샤드(Upanishad 30C BC)는 신(deva 하늘)에 대한 찬가인 베다(veda)를 해설한 책이다. 베다는 아리안족이 기원전 18세기경에 가지고 들어 온 경전이다. 그 내용에 의하면, 우주의 근원은 브라만(Brahman 梵)이며, 우주의 창조자인 브라만(Brahman), 파괴자인 쉬바(Shiva), 보존자인 비슈느(Vishne)의 삼신이 일체(trimurti)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개인 속에 내재하는 원리가 아트만(atman 眞我)이며, 범아는 일체(梵我一體)라 하였다. 전생(前生)의 업보(業報 karma)에 따라 윤회전생(輪回轉生)을 하게 되므로, 범아일치(梵我一致)로 윤회에서 해탈해야 한다고 말한다. 엄격한 카스트 제도(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를 기반으로 출현한 이러한 브라만교사람이 구원을 받으려면 인도인으로 태어나 브라만이 되어야 하며, 제사, 지혜, 봉헌을 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러한 사상은 기원전 1,500년경 힌두교(Hinduism)로 계승되어 인도인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다. 힌두교는 인과응보, 윤회설 등의 브라만 사상을 그대로 이어 받았다. 그 후 8백여년(300BC-500AD)을 지나면서 힌두교의 교리는 더욱 체계화되었다. 지금과 같은 근대적 교리는 8세기에서 15세기 사이에 다시 보강된 것이다. 흥미있는 사실은 이 때에 근대교리를 확립한 사람들이 유물론적이고 숙명론적이며 허무주의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J.B. 노스원저, 尹以欽역; 世界宗敎史(下), pp 581-624, 762-839, 玄音社, 서울, 2000]


  기원전 6-7세기경에는 이러한 힌두 교리에 반발하여 많은 자유사상가들이 일어났다. 그들은 산과 들의 나무와 바위에 앉아 부동의 자세로 진리를 깨달으려 정진하였다. 석가도 그들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 결과, 탄생한 대표적인 종교가 자이나교(Jainaism)와 불교(Buddhism)였다. 두 종교의 공통점은 인도인의 최대 관심사인 업(業 karma)과 윤회로부터의 해탈(解脫)을 이루는 방안으로 현실부정과 고행을 주장했다는 점이다. 전자가 철저한 고행을 주장한 데 반하여, 후자는 중도(中道)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카피라성의 왕자였던 석가(Gautama Shidata)는 인간의 생노병사(生老病死)에 대해 고민하다가 29세의 젊은 나이에 출가하여 보리수 밑에서 6년간 수행하며 진리를 깨달았다고 하였다. 부처는 산스크리트어로 붓다(Buddha)라는 말인 데 ‘진리를 깨달은 자’ 라는 뜻이다. 그가 깨달은 내용(大覺)은 '인생은 고해'(苦海)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인간의 고통(苦)은 욕심(集)에서 오므로 욕심을 없애야(滅) 참다운 깨달음(道)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사성체(四聖諦)라 부른다. 이러한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윤회(輪廻)에서 해탈(解脫)한 부처(神)가 되어 열반(nirvana)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는 브라만(梵 하늘)과 아트만(참나)의 존재를 부인하고 자아와 세계는 관계성에 의해 성립하며, 우주에는 변화만 있을 뿐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괴로움은 12 가지의 인연(전생2 + 현생8 + 내생2) 때문에 오는 것이며, 우리 눈에 보이는 현상계(現象界)는 색(色=물질, 육체), 수(受=감각, 지각), 상(想=인간과 세계의 개념구성), 행(行=의지, 기억), 식(識=순수의식)의 오감으로 형성되어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악이 존재하는 것은 절대자가 없다는 증거로 해석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절대자가 없다면 악의 개념이나 선악의 기준을 설정할 수 없다는 모순논리를 안게 되었다.


  불교는 자리적(自利的)인 구도에 정진하여 깨달음의 최고 경지(阿羅漢果)에 들어가자며 사체설(四諦說)를 강조하는 소승불교(hinaya 500BC-기원)에서 출발하였다. 그 후, 중국의 달마대사(達磨大師 520AD) 등이 제행무상제법무아(諸行無常諸法無我)의 공(空)사상과 연기설(緣起說)을 주장하며, 중생의 구원을 외친 대승불교(mahaya 기원-500AD)의 교리를 수립하였다. [윤이흠 역; ibid, pp 644-761], [Hiro Sachiya; 佛敎ト 基督敎, pp 13-17, 新潮社, 東京, 1986] 이처럼, 불교는 초월적인 인격신을 부정하며, 우주의 원리만을 인정하는 범신론(pantheism)임을 알 수 있다. 우주와 생명의 기원에 대해서는 인격신에 의한 창조설을 부인하며, 모든 것이 무시무종(無始無終)하고 우주에는 변화만 있을 뿐이라는 입장을 취한다. 인도에서 일어난 이러한 종교들의 공통점은 자연 속에 신의 성품이 들어 있는 것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자연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게 되어 자연과학의 발달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고대중국은 왕들이 백성들을 대표하여 유일신인 상제(上帝)에게 매년 제사를 드리던 제정일치(祭政一致)의 국가였다. 기원전 11-15세기의 상(商)과 은(殷)나라에서는 하늘의 옥황상제에게 제사했으며, 주(周)나라 때에도 하늘(天)에 제사했다고 한다. 여기에서 권선징악(勸善懲惡) 사상이 뿌리내리게 되었다. [전광호/우제태 공역; 고대한자 속에 감추어진 창세기 이야기, pp 15-31, 도서출판 예향, 인천, 1996, 원저는 Ethel R. Nelson & E. Broadberry; Genesis and the Mystery Confusius Couldn't Solve, Concordia Publishing House, St. Louis, 1994].


  기원전 10세기부터는 음양의 조화로 만물의 근본물질들(水火木金土)이 생성되었다는 음양오행사상(陰陽五行思想)이 나타나 유교, 도교와 더불어 중국인의 정신세계를 지배하였다. 그러다가, 주나라 때에 북방 유목민의 침입이 잦아지면서 이에 위험을 느낀 귀족들이 군대를 양성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황제는 상대적으로 유명무실한 존재로 전락하면서 전통 봉건제도가 무너지고, 일곱 국가들(진, 초, 연, 제, 한, 위, 조)이 할거하는 춘추전국시대(722-221 BC)로 들어서게 되었다. 이러한 국가간의 경쟁적 상황에서 제자백가(諸子百家)가 출현하여 현세적인 학문을 꽃 피우게 하였다.


   노자(老子 604 BC-?)와 장자(壯者 365-290 BC)는 자연을 중시했으나,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이해하고 인간이 자연으로 돌아가야 행복하다는 신비주의적이고도 회의론적인 무위자연(無爲自然)의 도(道)를 설파하였다. 노자의 사상이 집약된 도덕경(道德經)은 우주의 근본인 도(道)에서 기(氣)가 나오고, 기는 음기와 양기로 나뉘며, 이들의 조화로 나온 화합물에서 만물이 유래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존재는 비존재로부터 나온다고도 하였다. 그의 가르침은 도교(道敎 Taoism)의 형태로 유교와 더불어 중국인의 정신세계를 지배하였다. 공자(551-479 BC)와 맹자(371-289 BC)의 가르침을 유교(儒敎 Confucianism)라 하며, 이들의 사상은 사서(四書; 논어, 대학, 중용, 맹자)와 오경(五經; 시경, 서경, 춘추, 역경, 예기)에 집약되어 있다. 이들은 인간이 공동선(共同善)을 이루려면 다섯 덕목(仁, 義, 禮, 智, 信)을 갖추어야 한다고 하였다. 공자는 제자인 계로(季路)가 죽음에 대해 묻자 “삶에 대해서도 모르는 데 어찌 죽음을 알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고 한다. 이 밖에도, 묵자(博愛主義), 한비자(法治主義), 순자(性惡說), 맹자(性善說) 등이 나타나 다양한 통치이념을 제시하였다. 이처럼, 중국의 제자백가들은 인간사이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인 반면, 자연과 우주의 기원이나 현상에 대해서는 비교적 무관심한 편이었다. [윤이흠역; ibid, pp 865-1011]


  그 후, 진시황의 분서갱유(焚書坑儒), 뒤이어 일어난 한(漢)나라가 도교를 국교화 함으로써 중국의 유일신 사상은 급속히 다신론(多神論 polytheism)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후, 송(宋)의 주자(朱子 1130-1200)는 만물이 음(陰)과 양(陽), 이(理)와 기(氣)의 두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는 이원론적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을 집대성하여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의 성리학(性理學)의 발달에 큰 영향을 끼쳤다.


  우리나라에서는 옛날부터 하늘을 숭배하는 하늘신앙이 널리 퍼져 있었다. 환단고기(桓檀古記)와 태백일사(太白逸史) 등에 의하면 환인(桓因 하늘님)이 아들 환웅(桓雄)에게 비(雨師=북), 바람(風伯=거울), 구름(雲師=검)의 삼부인(三符印)을 주어 세상으로 내려 보냈다 한다. 그는 곰녀(熊女)와 결혼하여 반신반인(半神半人)인 단군왕검(檀君王儉 2370 BC)을 낳았다는 것이다. 단군은 아사달에 나라를 세우고 배달겨레를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이념으로 다스렸다고 하였다. [임승국 번역/해석; 환단고기, pp 15-22, 정신세계사, 서울, 1986].


  삼국초기에는 중국으로부터 불교가 전래되어 고려조까지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하였다. 그러나, 배불숭유책을 내세운 조선조 초기에는 유교와 주자학에 영향을 받은 성리학(性理學)이 이퇴계과 이율곡을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조선조 말기에 최재우는 ‘사람이 곧 하늘’(人乃天)이라는 동학(東學, 天道敎)을 창도하였다.


  일본은 다신사상이 지배하는 나라이다. 원시신도(原始神道)에 의하면, 고천원(高天原 Takamigahara)에서 제사를 받는 우두머리 신인 모노카미(Monokami 本神)에게 옷을 지어주며 제사를 드리는 천조대신(天照大神 Amateras Okami)이 게으름을 피우다가 모노카미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다른 신들의 청원으로 다시 살게 된 천조대신은 그 후 영신(靈神 Tamakami)이 되었으며, 그가 낳은 후손이 천황(天皇)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천황의 즉위식 때에는 모노카미에게 제사를 드리는 신상제(新嘗祭 ninamesai)를 거행한다. 이세신궁(伊勢神宮)이 대표적인 천황을 받드는 절간(神社)이다. [飛鳥昭雄, 三神タケル; 天照大神ノ謎, pp  42-46, 學習硏究社, 東京, 1998].


  일본서기(日本書紀)에 기록된 이러한 내용을 근거로 그들은 일본을 신의 나라로 자처하면서 동아시아 제국에 대한 침략의 근거로 삼기도 하였다. 이러한 천손신화(天孫神話)는 일본인의 조상이 큐슈남부의 아소산(峨蘇山)에서 솟아 나왔다는 지신신화(地神神話)와 대립하는 것으로, 우리나라에서 흘러 들어간 것으로 일본학계에서는 보고 있다. 최근에는 일본천황의 시조가 비류(沸流)라는 견해도 제기되고 있어 우리의 관심을 끈다. [飛鳥昭雄外; ibid, pp 137-1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