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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의 목적과 역사 2

야국화 2015. 8. 31. 15:43

학문의 목적과 역사 2
임번삼
명지대학교 외래교수
전 대상그룹 식품당당 대표이사
한국창조과학회 이사

(3) 서양의 구도활동


  서양학문은 그리스철학과 기독교사상(Christianity)에 바탕을 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학문의 역사를 말할 수 없으며 바르게 이해할 수도 없다.


   주지하듯이, 학문의 기원은 그리스의 밀레토스 학파(7 BC)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들은 동양인들과는 달리 논리적인 방법으로 진리의 실체탐구에 접근하였다. 그들은 처음에는 우주의 본질(en arche)이 물, 불, 공기, 흙이라는 일원론적 사고(monoism)에서 출발하였다. 그러나, 소크라테스(Sokrates 470-399 BC)는 연구의 대상을 자연으로부터 인간으로 전환시켰다. 그의 제자인 플라톤(Platon 427-347 BC)은 망각(忘却)의 레떼강 너머로 희미하게 어른대는 이데아계(睿智界 idea)가 진리의 본체라 하였다. 이데아계는 불변의 이상(理想)이며, 이것이 투영된 것이 현상계(現象界)라 하였다. 인간의 영혼(psyche)은 이데아를 인식하는 이성(理性)과 감정을 다스리는 기개(氣槪), 그리고 식욕이나 성욕과 같은 욕망(慾望)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였다. 그의 목적론적 이원론은 후일 기독교(특히 개신교)와 이슬람권의 환영을 받았다.


  플라톤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384-322 BC)는 형상과 질료를 구분하는 이원론적인 연구자세를 취하였다. 그는 인간은 질료인(質料因)인 점토(粘土)로 만들어진 육체, 조물주의 이미지인 형상인(形相因 영혼), 조물주의 손이나 도구에 해당하는 동력인(動力因), 이러한 물체(生命體)를 만드는 설계도에 해당하는 목적인(目的因)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였다. 그 중에서 그는 형상인을 중시하였고, 목적인과 형상인을 가진 것이 신이라 하였다. 그는 식물의 영은 영양적이며, 동물은 여기에 감각적인 요소를 가미한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 인간의 영혼은 동물의 영혼에 이성(理性)을 가미한 것이라 하였다. 그리스의 이원론은 그 후 다원론적인 원자론(atoma theory)으로 발전하였다.


  한편, 구약성경(舊約聖經)을 경전으로 하는 이스라엘의 유대교(Judaism)에서는 야훼 하나님이 우주의 창조주라고 주장하였다. 구약에 대한 해설과 실천방안을 해설한 탈무드(Talmud)는 유대인 뿐 아니라 세계의 정신사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그런가 하면, 2천년전에 태어난 예수(Jesus Christ)는 자신이 구약성경에 예언된 대로 인간세계에 내려 온(incarnation) 하나님의 아들이며,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파격적인 선언을 하였다. 다른 사람들이 진리를 탐구하고 있을 때, 그는 자신이 바로 진리의 실체라 선언한 것이다. 그리고, 그의 외침은 전 세계의 학계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7세기(606)에 마호멧에 의해 일어난 이슬람(Islam)은 유대교와 기독교에서 파생한 종교로 성경의 일부 내용에 마호멧의 예언(코란)을 포함시킨 알키탑(Al Kitab)을 경전으로 삼고, 알라(Allah)에게 절대복종을 요구하는 유일신교(唯一神敎 monotheism)이다. 그들은 코란과 칼로 중동을 포함한 지중해 연안을 삽시간에 지배하면서 찬란한 사라센문화를 꽃피웠다.


  한편, 기독교가 지배했던 중세 유럽에서는 신에 대한 증명(神論)과 세계와 자아를 관통하여 흐르는 시간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탐구(時間觀)하였다. 사도 바울(St. Paul) 이래 최대의 기독교 신학자로 불리우는 어거스틴(Aurelius Augustinus 354-430)이 수립한 직선적 시간관(linear view of time)은 비기독교적인 순환론적 시간관과 극명하게 대치되는 개념이었다. 그는 <두 도성>(Two Castles)에서 시간은 창조(創造)에서 출발하여 인류의 종말(終末)을 향해 달리는 화살과 같다고 하였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는 그리스철학과 하나님, 인간, 자연의 상호관계를 조화적으로 설명한 스콜라철학(Scolaticism, Thomism)을 수립하여 카톨릭에 범신론적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관을 도입하였다. 그는 하나님을 “만물의 제일 생성원인‘(Prima Causa)이라 하였다.


  13세기 이후에는 그리스와 로마시대로 복귀하려는 르네상스(Reneisance, Born Again)와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종교개혁(Reformation 1517-1650)이 일어나 근세과학의 탄생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이 때부터 철학의 주제는 신(神)으로부터 인간으로 바뀌면서, 인본주의(humanism)가 싹트기 시작하여 계몽주의에서 꽃을 피우게 되었다. 이러한 무신론적 인본주의가 힘을 얻게 된 배경에는 중세 카톨릭이 종교의 이름으로 인간을 억압해 온 데 대한 반발이 크게 작용한 것이었다. 한편, 루터, 멜랑히톤, 칼빈과 같은 종교개혁자들은 노동신성설(勞動神聖說)을 주장하였고, 자연을 숭배가 아닌 조작(操作)의 대상으로 선언함으로써 자연과학이 발전할 수 있는 정신적인 근거를 제공하였다.


   근세철학의 원조라 불리우는 데카르트(Rene Descartes)는 이원론(二元論 dualism)을 주장하면서, 주관(보이는 자기)과 객관(보여지는 세계), 마음과 물질로 나뉜 세계상을 어떻게 하나로 연결하여 해석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였다. 그리고, 진리탐구에 대한 방법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하였다. 이러한 회의론으로부터 근세철학이 싹트게 되었다. 데칼트의 방법론적 회의에 대하여 스피노자와 라이프닛츠를 중심으로 한 대륙의 합리론(合理論 rationalism)과 베이컨, 록크, 버클리, 흄 등을 중심으로 한 영국의 경험론(經驗論 empiricism)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해답을 추구하였다. 그는 화란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정신과 물질이 서로 다른 것이라면 왜 슬플 때 눈물이 나오느냐?'고 묻자, '신이 정신과 물질을 만들었으며, 이 세 가지(신, 정신, 물질)가 우주의 실체(實體)'라고 대답하였다. 스피노자(Baruch de Spinoza 1632-1677)는 '신이 유일의 실체'라 하였고(一元論), 라이프닛츠(Gottfried Wihelm Leipnitz 1646-1716)는 '신이 만든 비물질적이면서 독립적으로 운동하는 모노드(monod 單子)가 우주의 근본적 실체이며, 이들의 복합체가 세계를 이룬다'는 다원론(多元論 pluralism)을 주장하였다.


  이처럼, 데카르트의 영향을 받은 대륙의 합리론은 이성으로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고 보았으나, 영국에서는 이성의 한계를 인식하고 경험에 의존하려는 사조가 등장하였다. 유니테리언주의자였던 록크(John Locke 1632-1704)는 사람이 어려서부터 관념(觀念)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데칼트의 주장을 부인하였다. 그는 인간에 대해서는 물심이원론(物心二元論)을 주장하였으며, 신(神)을 만물의 제일생성원으로만 이해하였다. 인간은 태어날 때 백지같은 상태인 데, 교육을 통하여 감각(感覺)으로 그 위에 자기가 받은 인상을 그리며, 이를 반성하는 과정에서 관념이 형성된다고 하였다. 이러한 감각과 반성은 경험에 의존하는 것이며, 관념은 단순에서 복잡한 방향으로 발달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구미의 교육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버클리(George Buckley)는 인식(認識)이란 정신과 관념 사이에 있는 것이므로 여기에 감각세계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관념은 마음에서 나오며, 마음은 자유로운 존재(神)로부터 유래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마음 밖의 존재와 아무런 관계가 없이 경험은 생긴다고 하였다.


  이러한 대륙의 합리론과 영국의 경험론은 칸트와 헤겔로 대표되는 독일의 관념론(觀念論 idealism)을 통하여 하나로 통합되었다.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는 <순수이성비판>에서 감성으로 알 수 없는 세계를 물자체(ding an sich)의 세계라 하였다. 인간이 시공을 통해 감성(感性)으로 현상을 인식하고, 오성(悟性)으로는 현상을 정리하여 개념화한다고 하였다. 이성(理性)은 경험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며, 이성으로 마음 속의 도덕율(道德律)을 깨닫게 된다고 하였다. 그는 신이나 영혼과 같은 문제는 경험이나 이성으로는 알 수 없는 ‘물자체’의 세계에 속한 것이라 하여 이성의 한계를 지적하고 비판하였다.  <실천이성비판>에서는 ‘양심의 소리’에 따른 도덕율을 강조하였고, <판단력비판>에서는 ‘천상의 별’(물자체)과 ‘마음속의 도덕율’(행위의 기준)을 연결시킴으로써 주관과 객관을 일치시킬 수 있다고 하였다. 이처럼, 순수이성을 비판함으로써 데칼트가 제기했던 문제(주관과 객관, 물질과 정신의 연결문제)는 이론적인 해결을 보게 되었으며, 도도히 흘러 온 철학의 사조는 사실상 대단원의 막을 내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헤겔(Georg Wilhelm F. Hegel 1770-1831)은 세계를 하나의 거대한 체계로 보고, 인간의 성장이나 역사의 발전이 정(正 these)과 반(反 antithese)이 대립하다가 합(合 synthese)으로 조화되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세계정신(World Spirit, Welt Geist)을 향해 발전해 간다고 하는 변증사관(辨證史觀 dialectic view)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 1818-1883)는 헤겔의 그러한 이론이 추상적이라고 비판하면서, 세계는 해석의 대상이 아니라 변혁의 대상이며, 모든 세계는 물질로 되어 있다는 유물론(materialism)을 주장하였다. 그는 정신도 물질에서 나온다고 하였고, 종교는 민중을 마비시키는 아편이라고 공격하였다. 인간의 역사는 계급투쟁이 없었던 원시공산사회에서 노예제도, 중세봉건제도, 자본주의, 사회주의를 거쳐 공산유토피아에 이르게 된다는 유물사관(唯物史觀 materialistic view)도 제시하였다. 그러나. 공산종주국인 소련이 몰락하고(1989) 중국이 자본주의를 수용함으로써 이러한 마르크스의 예언은 빗나가게 되었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서양철학의 시대적 특징을 요약한다면 그리스철학은 근본에 대한 탐구시대요, 중세철학은 신학적 철학시대이며, 근세철학은 체계적 철학시대라 할 수 있다. [甲田 烈等; ibid, pp 34-35]



(4) 진리의 본체


  1995년 어느 밤은 나에게는 잊을 수 없는 날이다. 진리가 무엇인지 내 나름으로 깨달았으니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오랫동안 찾고 있는 진리의 실체를 발견했으니 흥분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 내용은 매우 단순했지만, 내게는 매우 명확한 것이었다.


  모든 학문은 깊이 파고 들어가면 결국 <진리의 샘>에 도달하게 된다. 자연과학(생물학, 물리학, 화학, 지질학, 천체학)의 많은 법칙들 (예컨데, 유전법칙, 열역학법칙, 파스칼의 원리, 만유인력의 법칙, 상대성원리, 질량불변의 법칙 등)이 그것이다. 인문과학(철학, 문학, 수학, 신학, 사학)에서는 귀납법, 연역법, 생명의 존엄성, 진리의 추구, 피타고라스의 정리, 역사정신 등을, 사회과학(법학, 경제학, 경영학, 사회학, 정치학, 인류학)에서는 한계효용의 법칙, 경세제민의 원리, 자유, 정의, 평등정신, 법의 정신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원리나 법칙들은 반론할 수 없는 확고한 원리들이지만, 이들을 바로 진리라 부르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느낌이 있다. 어디까지나 원리요 법칙일 뿐이며, 진리의 한 단면을 발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진리의 샘>을 더 깊이 파고 들어가면 그것을 뿜어내는 <거대한 수맥(水脈)>에 도달하게 된다. 자연과학의 법칙과 원리 및 정리들은 결국 자연의 원리를 탐구하여 활용하려는 것이며, 인문과학의 제반 법칙이나 정리, 사회과학에서의 양심법, 자유, 정의, 평등의 추구는 자연현상을 본질적으로 이해하고 생명과 인간존엄을 지키려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수맥을 더 깊이 파고 들어가면 이들은 <진리의 강>과 만나게 된다. 앞에서 기술했던 모든 법칙과 원리들이 결국은 우주 안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우주의 지배를 받는, <우주의 법칙>이라는 말이다. 이 세상의 모든 현상은 예외가 없이 우주의 법칙 아래서 움직이고 있다. 우주법칙이란 ‘온 우주에 통일되게 작용하고 있는 거대한 질서체계’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우주의 법칙은 우리가 그것을 느끼든 못 느끼든, 알든 모르든 간에 우리의 인식과는 무관하지만 일관되게 작용하고 있다. 자연계 속의 모든 생물이나 인간은 그 법칙 아래서 움직이고 살다가 사라지는 한시적 존재일 뿐이다. 그런데, 이처럼 거대한 우주계에는 변하지 않는 질서가 존재하게 마련이다. 만일, 우주계의 질서가 수시로 변하든지 지역에 따라 달라진다면 우주는 존재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변하지 않는 우주법칙을 탐구하려는 것이 모든 학문의 궁극적 목표라 할 수 있다. 

  그러면, 이러한 <우주의 법칙>이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여러 진리의 강들은 흐르고 흘러서 마지막으로 <
진리의 바다>에 이르게 마련이다. 그곳이 바로 진리의 원천이요 진리의 형체가 숨쉬는 곳이며, 진리가 베일을 벗고 자기 모습을 드러내는 곳이다. 그러면, <진리의 바다>란 과연 무엇일까? 그 마지막 베일을 걷고 보면 그것은 놀랍게도 우주와 우주의 법칙을 만들고 운용하시는 우주의 창조자인 하나님을 발견하게 된다. 그 하나님이 우주를 만드시고 일정한 우주의 법칙에 따라 우주를 운행하시기 때문에 만물이 조화롭게 돌아가며 생존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그토록 오랫동안 찾아 헤메던 진리의 본체는 다름 아닌 창조주였던 것이다(그림 1).



  그러면, 이러한
창조주는 과연 존재하는가 하는 최종적인 물음에 우리는 봉착하게 된다. 이것은 분명 믿음의 영역에 속하는 문제이다. 그렇다고 해서 자연과학의 문제가 아닌 것도 아니다. 학문적인 문제이면서 개인적 선택을 요구하는 문제이다. 학문적 문제라 함은 창조주가 실존하고 우주를 만드신 분이라면 창조론적으로 자연현상을 설명해야 합리적일 것이기 때문이다. 창조주를 공부한다는 것은 자연과학의 세계를 넘어 신학과 철학의 영역에 속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자연과학만의 문제가 아니다. 여기에서 물질계를 연구대상으로 하는 자연과학과 형이상학을 연구대상으로 하는 인문, 사회과학이 서로 만날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절감하게 된다.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1,500 BC) 기록물인 성경(Bible)에서는 “만물이 주(主)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갈 것“(롬11;36)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여기서, 주(主)란 예수를 지칭하는 말이다. 예수가 우주를 만들고 운행하며, 만물이 궁극적으로는 그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학문을 깊이 탐구하면 궁극적으로는 진리의 본체인 예수그리스도와 만나게 된다는 말이다. 이것이 학문의 목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사람들은 동의나 거부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개인의 선택에 속하는 문제이다. 이러한 선택은 학문적 선택이면서도 인생관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게 될 것이다.


  역사적으로, 성경에 기초한 기독교사상은 헬레니즘과 더불어 서양학문의 근간을 이루어 왔으며, 세계사적으로 모든 분야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 자연과학 분야에서는 성경에 기록된 내용을 그대로 믿는 성경적 창조론(biblical creationism)이 다윈의 진화론(19C)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서양학문을 지배하였다. 이와는 달리, 성경기록이나 진화론과 관계없이, 절대자의 지적설계에 의존치 않고서는 자연계의 기원이나 운행에 대해 과학적인 해답을 얻을 수 없다고 보는 입장이 과학적 창조론(scientific creationism)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절대자란 창조주가 될 수도 있고, 자연법칙을 지칭할 수도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과학적 창조론은 범신론적인 성향을 내포한다. 성경적 창조론과 과학적 창조론은 일부 주장에서는 일치하지만 다른 부분도 많다. 그러나, 진화론과 대치된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과학적 창조론은 후일, 유신진화론의 탄생을 예고하는 신호탄이기도 하였다.



(5) 진리의 목적


  우주(universe, cosmos)는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질서체계(orderness, cosmos)이다. 질서가 무너지면 우주는 존립자체가 불가능하다. 이러한 질서는 생명을 살리기 위한 것이며, 그 중에서도 만물의 영장인 사람을 위한 것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모든 질서의 지향방향은 생명을 살리는 쪽으로 나가야 한다. 생명을 최우선으로 하고, 인간성을 꽃피우며, 자유, 정의, 진리를 실현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 우리는 이미 역사를 통하여 ‘지식에 지식만을 더하는 학문’은 인류에게 해로운 역기능을 했던 많은 사건들을 보아 왔다. 따라서, 이러한 잘못된 역사가 더 이상 반복되지 않도록 우리는 파수군의 역할을 해야 한다. 참다운 진리는 사람을 얽매는 것이 아니라, 자유케 한다는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학문의 목적인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세 학문 간에 경계선을 긋는 일은 부질없는 노릇인지도 모른다. 오늘의 자연과학은 그 연구대상이 실험 가능한 물질계(物質界)로 국한이 되어 있는 것은 16세기부터 베이컨과 로크의 귀납적 경험론의 도입, 그리고 데카르트와 라메뜨리의 생명기계론(生命機械論)이 과학자들에게 널리 수용되었기 때문이다. 그 이전까지는 학제 간에 구분이 없었다. 그래서, 옛날에는 많은 학자들이 철학자이면서 동식물학자요, 의학자이면서 수학자이기도 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자이면서 동물학자였으며, 데카르트는 철학자이면서 수학자요 물리학자였고, 다빈치는 예술가이면서 해부학자였던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베이컨을 비롯한 경험주의자들은 자연과학을 발전시킨 방법론을 제시한 공로자들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학문의 궁극적 목적인 진리를 발견치 못하도록 오도한 책임도 아울러 져야 하리라는 생각이 든다.


  자연과학자에게 인문과학과 사회과학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창의와 영감의 원천이다. 반대로, 인문과학자와 사회과학자에게는 자연과학이 추상적 연구대상에 대한 실증의 수단이 된다. 따라서, 물질계를 연구대상으로 한정한 오늘의 자연과학은 진리의 본체를 규명하는 데 있어서 구조적인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진리는 형이하학이 아닌 형이상학의 영역에 숨어 있으며, 학제의 연계를 통해서만 발견될 수 있기 때문이다. 형이하학적인 생명활동은 형이상학적인 생명이 연출하는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물질계로 한정된 자연과학의 학제는 일정한 부분을 인문과학과 사회과학을 보강하는 방향으로 개편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인문, 사회과학분야에 대해서도 역으로 적용되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