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에서 말하는 `中國이란?`
다른 분들이 훈민정음에서 말하는 中國이란 용어에 대해 궁금해 하기에 이렇게 몇 자 적습니다.
훈민정음에서 "나라의 말 소리가 中國과 달라서 문자와 더불어 서로 통하지 못 한다"라는 中國은 쥐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나라 가운데 즉 국내를 뜻하는 國中을 뜻하는 겁니다.
무엇보다 세종대왕 당시에 중국이라는 국호를 쓰는 나라가 지구상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훈민정음을 반포한 것이 1446년이고 중국(쥐나민국)이라는 국호는 1911년 짱골라 손문이 신해혁명을 일으켜
배달갈래왕조인 고구려 후예 청나라를 무너뜨린 후에 생겨난 공식적인 국호로 세종대왕때보다 무려 465년 후의 일입니다.
<오제본기> 제1에 기록된 '제왕소도위중帝王所都爲中 고왈중국故曰中國과 <목천자전>의 수우중국樹于中國,
<맹자>의 진양북학우중국陳良北學于中國 등에 기록된 중국中國이라는 글자는
그 나라 내에서 임금이 있는 가운데 장소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다민족국가개념에 있어서도 쥐나와 미국은 전혀 다릅니다.
미국은 건국초부터 이민을 받아들여 세워진 다민족국을 처음부터 표방한 나라이고,
쥐나는 그 동안 동아시아를 지배했던 배달계통왕조들이 약해진 틈을 노려 세워진 그것도 짱골라 한족만을 위하는 나라입니다.
역사적으로 짱골라왕조는 한, 송, 명 3왕조뿐입니다.
그 외의 모든 왕조들은 모두 배달갈래 중에서도 동이계와 흉노계 그리고 융족계가 건국한 것입니다.
수,당마저도 배달 흉노계 선비족국가들이죠.
과거 짱골라의 한나라는 북쪽 배달계 흉노와 동쪽 배달계 북부여의 속국이었습니다.
송나라는 배달 흉노계 거란의 요나라와 고구려 후예 여진의 금나라의 속국이었으며 끝내는 배달 흉노계 몽골의 원나라에 멸망당합니다.
명나라는 고구려,발해의 후예인 여진(만주)족의 청(후금)나라에게 멸망당하고 말입니다.
짱골라들이 실제 조공을 받을 수 있었던 적은 명나라때 뿐입니다.
청나라 때의 자금성은 원래 고구려 성곽 축조 방식이었는데, 짱골라들이 허물고 쥐나식으로 개축했죠.
고등학생때 국어선생이 하던말이 아직도 생각이 납니다.
훈민정음 서문을 배우던 그때
" 國之語音異乎中國 與文字不相流通 故愚民有所欲言而終不得伸其情者多矣 予爲此憫然 新制二十八字 欲使人易習使於日用矣”
해석을 이렇게 하더이다
나라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와 더불어 서로 통하지 않으매 우매한 백성이 말하고자 하나 종래는 그 뜻을 얻지 못하는자가 많으므로 내 이를 민망히(불쌍히) 여겨 새로 28자를 지어 사람으로 하여금 쉽게 익히어 일용케 함이라.
이렇게 해석해놓고 보면 꼭 쥐나의 변방 제후국정도로 밖에 안보이더이다 이때 부터 저는 자존심이 많이 상했었습니다.
그런데 이 해석은 엄청난 오류를 가지고 있음을 밝힙니다
현 中國측의 사전을 보면
"中國이란? 나라 이름이 아니라 중원 즉 나라의 한 가운데,천하(天下)의 중심지(中心地)이며,
中國이란 이름으로 다른 나라에서 나라이름으로 사용치 못하도록 1911 년 이후에 나라이름으로 처음 사용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1911년 신해혁명 당시 쑨원이 쥐나인민공화국으로 이름을 만든것을 줄여서 중국이라 부르는것입니다
그럼 그 이전에 중국이라는 나라가 있었나요?
물론없습니다 그럼 그 이전 역사서에 나오는 중국이라는 지명을 왜 한족의 나라들로 해석을 하는걸까요????
분명 중원대륙의 나라들은 당, 원, 명, 청 이라는 국호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짱골라 한족인 쥐나의 나라를 중국으로 불렀다고 한다면 또 하나의 오류가 발생합니다
한족은 자신의 왕조가 나라를 세운게 몇 개 안 되기 때문입니다
실제 짱골라 한족의 왕조는 한, 송, 명 3왕조뿐입니다.
복희, 신농, 공손헌원, 요임금, 순임금 등 삼황오제 모두 배달 한겨레입니다.
진시황의 진나라마저도 배달 흉노계 국가죠.
실제 짱골라의 왕조는 한,송,명 3왕조뿐이며 이들이 설쳤던 세월은 고작 수백년 밖에 안 됩니다.
한나라는 북쪽 배달계 흉노와 동쪽 배달계 북부여의 속국으로서 조공을 바치며 연명했고,
송나라는 배달 흉노계 거란족의 요나라와 고구려,발해 후예인 배달 부여계 여진족의 금나라에 조공을 바치며
힘겹게 속국으로 살아가다 배달 흉노계 몽골족의 원나라에 병합되어 사라집니다.
명나라 역시 고구려,발해의 후예 여진족의 청나라(후금)에게 망합니다.
(+고구려,발해의 백성이었던 배달계 말갈족이 이후에 여진족으로 불리고 다시 만주족으로 불리는 것입니다. 다른 민족이 아니라 같은 민족입니다. 이것 역시도 짱골라들이 고구려,발해 후예인 그들 배달계 말갈족이 다른 민족인 것처럼 조작하기 위해 시대에 따라 달리 부른 것입니다)
오히려 짱골라들이 배달계왕조들의 지배에 있었고 혹은 속국으로 살아간 노예종족입니다.
(실지로 짱골라족 자체가 허구의 개념입니다. 조작,날조를 시작하면서 허구의 종족을 내세운 것에 불과합니다.)
직접적으로 짱골라의 시작은 유방의 한나라때부터입니다.
이 때부터 사마천의 사기를 집필하는 등 여러 역사조작 왜곡을 시작합니다.
진시황의 분서갱유로 많은 서적들과 자료들이 불타버린 관계로 조작하기가 한층 쉬웠죠.
옛날(B.C 200) 쥐나의 사마천은 당시까지 정립되지 않았던 쥐나의 역사를 2600년을 거슬러 올라가 짱골라의 역사를 편찬했습니다.
그것이 쥐나의 사기입니다. 소위 말하는 춘추필법으로 말이죠.
즉 자기들은 한껏 올리고 주위의 국가나 민족은 한껏 깎아 내리는 못된 필법으로 말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당시에는 그들 스스로도 그것을 역사서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약간 양심은 있었던지....)
그것이 약 300년 후에야 정식 쥐나의 사서로 채택된 것입니다.
그것도 후대의 왕들이 자기들을 높이기 위해서는 안성맞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한번 생각해봅시다.
2600여년이란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닙니다.
당시까지 정립되지 않았던 그들의 역사라고 하는 것은 정식역사라고 할만한 사료가 그때까지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사마천은 2600년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단숨에 정립(?)했던 것이죠. 사마천이 편찬한 사기史記25권......
진시황의 분서갱유 등의 여러 이유로 인해 당시까지 제대로 된 사료가 없는 상태에서 사마천이 그 많은 사서를 편찬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죠. 따라서 사마천이 서술한 역사들은 거의 꾸며낸 짱골라 위주의 재미있는 책에 불과합니다.
그러니까 그들 자신도 어처구니가 없었던지 그것을 정식역사로 인정을 하지 않았던 것이죠.
짱골라는 역사를 삭제,왜곡하는 등의 방식뿐만 아니라 그들은 사이四夷라 하여 북적,동이,서융,남만으로 나누어
배달 한겨레를 흉노,동호,몽골,선비,묘족,말갈(여진)족,돌궐,거란,강족,오환,저족 등으로 계속 분리되도록 유도해왔습니다.
이夷란 뜻마저 오랑캐로 변질시키기까지 했죠.
반면에 짱골라는 서로 다른 민족과 결합되도 양친 중 한명만이라도 짱골라면 그 혼혈인은 짱골라다라는 정책을 편 것이죠.
누구는 결합되면 민족이 사라지고 누군 마찬가지로 결합되도 민족이 불어나는 말도 안 되는 억지를 계속 한 것이죠.
북부여,동부여,졸본부여(고구려) 등은 한웅배달국과 단군조선국의 후예들로 농경과 유목기마를 함께 하는 대표적인 반농반목민족국가이고 몽골,돌궐 등은 전형적인 유목기마민족국가죠.
배달 한겨레는 여러 지역에 따라 여러 모습으로 퍼져 살았기 때문에 어느 하나를 보고 그것이 모두를 대표한다는 것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일 뿐만 아니라 어불성설입니다.
배달 한겨레는 농경민족이면서도 유목기마민족이며, 그의 후예 백제나 왜열도 등 해상민족이기도 한 것입니다.
유방 한나라 이전에는 짱골라가 존재하지 않았죠.
아니 없어졌다고 보면 됩니다.
화하족은 낙양 중심으로 살아가던 소수민족이었죠.
시간이 흘러 화하족은 배달민족들에게 흡수되어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유방의 한나라 때부터 자신의 치부를 가릴려고 조작하게 되면서 짱골라 개념을 갖고 나오게 된 것이죠.
한나라가 영토확장하려다 북쪽 배달계 흉노와 동쪽 배달계 북부여에게 대패해서 그들에게 조공을 바쳐가며 살아가는 속국으로 전락하죠. 이런 상황 등이 그들에게 조작,날조하도록 더욱 부채질하게 되죠.
진시황의 분서갱유로 조작하기는 더욱 쉬운 것은 말할 필요없죠.
짱골라들이 타국을 침략할 때 가장 먼저 한 일이 그 나라의 사고에 있는 역사서나 수많은 저서들을 약탈하거나 불태운 것이었죠.
지들이 저질러놓고 그것을 믿으라 하는 심보가 정말 가관입니다.
지들이 없애놓고 니네는 원래 그런 것 없었다 하면 말이 됩니까?
민족에 의해 그 역사가 탄생하는 것이지, 영토에 의해 역사가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민족의 흥망성쇠에 따라 영토의 변화가 있을 뿐이죠.
짱골라들이 내세우는 역사관의 맹점은 시간의 연계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더욱 공간(영토)를 확보하여 날조,삭제하려고 ㄱㅐㅈㅣ랄을 떠는 것이죠.
민족이란 용어가 근대 국민국가 이후에 생겨났다고 해서 배달 한겨레가 부정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민족이라는 말을 사용하기 훨씬 이전부터 겨레라는 순수 우리말을 사용해 오고 있습니다.
겨레는 같은 혈족,언어,풍습,문화 등을 공유하는 용어입니다.
고대의 배달겨레가 크게 동이계,흉노계와 융족계 등으로 나누어졌지만 그 뿌리는 함께 공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배달민족이 먼저 생긴 개념이고, 이것이 후에 광의의 동이족, 협의의 동이족 개념으로 나누어집니다.
그리고 배달계통이 흉노,예맥,말갈(여진),돌궐,동호,거란,선비,묘족,오환족, 강(티벳)족, 장족 등으로 좀더 세분되어집니다.
배달민족이란 용어 안에는 흉노계나 융족계,동이계 등 모두 담을 수 있는 말이지만 동이족이란 말은 그렇지 못 하죠.
그리고 한웅배달시대가 단군조선시대보다 더 이전의 시대니 당연한 것이죠.
요하문명 전시회도 심양이나 대련에서 열고 있는데 짱골라들은 그 유산들과 우리 배달 한겨레의 연관성을 숨기려고 엄청 노력을 하더군요. 그래서 역사공정을 더욱 펼치는 것이죠.
드러나는 한웅배달국의 홍산문명이나 단군조선국의 요하문명 등 여러 고대 유적들과 학자들의 발표로 점점 사실로 드러나고 있죠.
세계 학술대회에서도 여전히 홍산문명을 주제로 벌어지고 있으며 국회에서는 2006년 생방송으로 국회방송도 했었습니다.
홍산배달문명의 발견으로 러시아,독일,미국 등 세계 학자들의 유적 방문조사가 보다 대대적으로 벌여지려 했으나 짱골라들이 이를 막아서 모든 게 지지부진하게 지체되어 있는 중입니다.
지금 짱골라들이 그 고대 유적들을 조사 못 하게 군사통제구역으로 설정해서 출입을 아예 틀어 막고 있으며 그 유적들의 일부는 물에 수장시키거나 나무를 심는 등 여러 방법으로 파괴하고 또다른 일부는 유적지 자체를 들어내어 거기에 인위적인 장치를 하는 등 여러 방식으로 조작하고 있는 것도 알았으면 합니다.
지금까지 드러난 여러 유적과 유산들로 인해 한웅배달국과 단군조선국의 실존은 점점 확정되고 있거나 확정되었습니다.
이번 2007년 국사교과서부터는 단군조선국의 역사가 편입되었습니다.
지금까지 학계의 연구 결과로 통해 본인 역시 한웅배달국과 단군조선국의 실존을 더더욱 확신하게 되었지만 한웅배달국의 이전의 환국시대에 대해서는 아직 판단유보중입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오랑캐라 치부하던 치우천황이나 단군,징기스칸 등을 지금에 와서는 짱골라들이 자신의 조상이라고까지 우기는 코미디도 연출하고 있죠.
실제 복희,신농,요순임금 등 삼황오제 모두 배달민족일 뿐 아니라
진시황의 진나라 역시 배달 흉노계 국가이니 이미 말 다 했죠.
남의 조상,역사,업적 등을 빼앗으려 하는 짱골라들.
한,송,명 3왕조를 제외하고는 수많은 배달왕조들에게 지배당한 짱골라들.
그래서 짱골라들은 배달 한겨레에 대해 그렇게 열등감과 두려움으로 똘똘 뭉쳐있나 봅니다.
<사고전서>는 청나라 건륭 황제 때 연간 1000여명의 학자를 동원, 10년에 걸쳐 국력을 기울여 편찬한 동양 최대 총서로 무려 7만9천여권에 달합니다. 고대부터 청나라에 이르기까지 역대 중원의 주요 문헌들을 거의 다 망라하고 있는 이 책은 그 사료적 가치를 국내외에서 모두 인정하는 동양의 대표적인 고전 총서입니다. 특히 그 중에서도 동이 사료 안에는 한국역사, 동양역사의 물꼬를 바꿀 수 있는 그야말로 새로운 발견에 필적하는 귀중한 자료들로 가득 차 있죠.
만약 고대부터 청나라때까지 역대 중원대륙 모든 왕조들의 역사서들을 그 출처로 하여 종합편찬한 <사고전서>를 부정한다면 그것은 그 출처였던 중원대륙의 모든 사서들마저도 부정하는 자가당착에 빠질 뿐이죠.
청나라의 <사고전서>나 남한의 <조선왕조실록>은 모두 이미 디지털화되어 있어 일반인들도 확인이 가능하죠.
수많은 세월을 배달 한겨레 왕조들에게 정복만 당한 짱골라 한족들이기때문에 과연 정복 왕조들인 수(배달 흉노계 선비족), 당(배달 흉노계 선비족), 요(배달 흉노계 거란족), 금(배달 부여계 여진족), 원(배달 흉노계 몽골족), 고구려,발해 후예 부여계 여진족의 청(후금) 등 많은 배달 한겨레 왕조들이 쥐나의 짱골라 한족과 같은 울타리인 중국이라는 국호로 통일해서 역사서를 집필했냐하는것입니다
청나라의 경우 여진족인데 그것은 우리와 뿌리가 아주 비슷한 형제와 같은 만주족들입니다.
그들도 우리처럼 백두산을 영산으로 생각하고 드러운 한족은 절대 백두산 근처의 지역으로는 출입을 통제하고 어길시 참형에 처하는 봉금정책을 써왔던 민족입니다
그러한 청나라가 자신의 국호 청을 버리고 중국이라는 단어를 썼다고 볼수없으며 1900년이전에는 중국이라는 국호를 가진 나라가 없었으므로 한족의 나라로 해석하는것은 무리가 많다는것입니다
그렇다면 中國이라는 단어는 1911년부터 나라 이름으로 쓰인 말인데 훈민정음에 나온 단어는 뭐란말인가???
그당시 쥐나의 나라는 명(明)나라 였으며 그럼 훈민정음에 나오는 중국을 명나라로 보고 해석을 다시 해봅시다.
대륙이 명이며 한족의 중국이고 한반도가 조선이라면 조선의 말이 대륙의 중국 즉 명나라의 말과 다르므로 백성들이 의사소통에 큰 불편함이 있음으로 이로 인해 한글을 만들었다?????
논갈고 밭갈던 일반 백성들에게 있어 명나라와 소통되지 않음이 뭐가 그리 불편해서 문자까지 창조햇을까요.
상식적으로나 실제적으로도 말이 안 됩니다.
조선의 말과 중국 즉 명나라의 말이 다른것하고 조선 백성들이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것 하고 대체 무슨 관련이 있는것일가요???
일반 백성이 명나라놈과 소통할일도 전혀 없을 거고 조선내에서는 백성은 한자를 몰라도 말은 분명히 있으므로 이를 나타내기 위해 소리글자를 사용것 뿐입니다.
훈민정음은 세종대왕을 칭송하며 백성을 위한 것이었다는 입장에 서서 해석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훈민정음 서문에 나오는 듕국(中國)이라는 지문은
"나라의 말들이 中國(중앙지방,나라의중심)과 달라 문자가 달라 서로 통하지 않으매....."
라고 해석하는것이 옳은 것입니다. 실제로도 그렇고...
즉 일반백성을 위한 것이었으므로 명나라 운운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입니다.
여기서 중국은 황제 계신곳 바로 세종이 있는곳을 말하며,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오면서 정권을 잡은 후조선왕조의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백성들 말이 서로 달리 쓰였으므로 이런 취지로 훈민정음을 보다 널리 사용할 이유가 된 겁니다.
그때 당시 이런 기록까지 있었습니다
당시 전남 순천에서 아들이 아버지를 죽였다는 패륜적 사건이 보고된다.
그래서 삼강행실도를 간행한다.
그런데 일반 백성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쉽게 알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공주에게 부탁한다.
○○공주는 옛날의 어떤 글자를 참고하여 정리한다.
또하나 우리가 배우는 한자랑 그때 당시의 한자는 음과 뜻이 약간씩 틀렸기에 이런 오류를 범하는것입니다.
왜 중국을 중앙지방이라고 해석을 하냐하면 바로 國이라는 단어때문입니다.
지금은 저 단어가 나라를 가르키지만 예전의 역사는 성(城)정도 크기나 땅(地)의 의미로 봤기 때문입니다.
근세조선초기까지도 사병을 가지고 있는 성읍국가였기때문입니다.
그러한 성들이 모여서 한개의 커다란 나라를 만드는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삼국지연의라는 소설을 보시면 됩니다. 수십개의 성이 있고 그성을 빼앗아서 제후국으로 삼고 자신의 나라안에 편입시키는 개념이죠.
근세조선이라는 나라를 이해할수있게끔 지문하나를 참고로 올리겠습니다
( 문종실록.원년)
중추원사(中樞院使) 안숭선(安崇善)이 상서(上書)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여러 도의 군(郡)·현(縣)의 땅이 혹은 크기도 하고 혹은 작기도 하여 강역(疆域)이 바르지 아니하고 견아상입(犬牙相入)하여서 이 때문에 백성들이 그 폐단을 받은지 대개 여러 해입니다.
우리 나라 군(郡)·현(縣)의 땅은 본래 정한 제도가 없어서 처음에 세울 때 향리 품관(鄕吏品官)이 서로 다투어 빼앗았으므로, 힘이 있는 자는 많이 점령하고 세력이 없는 자는 적게 얻었습니다. 그 토산(土産)이 있는 비옥한 땅을 다투어 먼저 점령하였으므로, 이 때문에 한 현(縣)의 땅이 혹은 몇 군(郡)의 경계(境界)에 섞여 들어가고, 혹은 몇 군(郡)의 밖으로 끊겨 들어가서, 백성들의 공부(貢賦)·요역(?役)·사송(詞訟)이나 짐바리를 싣고 왕래할 때에 동일한 관부(官府)인데도 몇 군(郡)을 지나고 3, 4식(息) 밖까지 말을 달려가서 반드시 청단(聽斷)하게 됩니다.
부서(簿書)·기회(期會)할 즈음이나 차임(差任)·추징(追徵)할 때에 백성들을 많이 편달(鞭撻)하고 아전[吏]이 침탈을 행하므로, 동일한 적자(赤子)인데도 수고하고 평안한 것과 고생하고 쉬는 것이 이처럼 현격하게 다르니,
하나의 봉강(封疆)과 하나의 지역(地域) 사이에서 백성들에게 병폐되는 것이 이보다 심한 것이 없습니다."
위의 내용으로 중앙에서 행정구역을 나눈 것이 아니라 지방세력이 서로 전쟁을 하여 강역 크기를 결정한 것이기에 지방 세력의 다툼이 힘의 세기에 따라 지역의 강역 크기가 달랐다는 것입니다
힘이 있는 자는 많이 점령하고, 토산(土産)이 있는 비옥한 땅을 다투어 먼저 점령하다보니 지역의 경계가 개 이빨처럼 들숙 날숙하여 일반 백성들은 고생이 심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중앙정부에서 이러한 백성들의 불편함을 해소하고자 지역경계를 바로하라는 압력을 행사하자는 의견인 것입니다
근세조선초기 지방정부에 중앙조정의 힘이 아직 미치지 않았을 때 지방정부는 나름대로 그들의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지방에서도 서로 다툼을 하여 그들의 세력을 확장하고 그들의 강역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러고 난 뒤 나중에 지방정부는 중앙정부(中國)에 그 강역을 봉토받으면 되는 것이었다.
물론 중앙에서 지방으로 내려보내는 지역도 있었겠지만... 근세조선은 완전한 중앙집권이 되지않은 나라이며 지방마다 그 세력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개의 나라임에도 경계가 다르고 전쟁까지 하는 연방국가라는것을 알수있습니다.
그 연방마다의 언어가 중앙정부와 잘맞지않고 백성들이 잘못된 언문으로 인해 율법을 잘못 이해해서 큰 고초를 겪고 언문이 약간씩 다른것이 말과 글이 통하지 않아 지방마다 또는 중앙정부와의 교류시 어려움이 많아서 사용하게 된 것이 한글입니다.
우리의 삼국시대(원래는 가야를 포함한 사국시대나 열국시대라 부르는게 옳음)부터 중국이라는 말을 우리 사서에 써왔으며 쥐나도 당나라 이전부터 써왔었습니다.
그렇다면 온갖 사서에 나오는 수없이 나오는 중국이라는 단어를 쥐나의 한족국가로 해석을 한다면 역사가 뒤죽박죽이되고 온갖 역사가 쥐나의 것이되는 헤프닝이 될것입니다
동북공정은 단지 고구려의 역사만을 노리는것이 아님을 아시고 그들의 국호또한 제대로 이해하고 불러야겠습니다
앞으로는 그들의 국호이면서 세계인이 부르는 china(쥐나)라는 단어를 써주시고 우리 스스로를 동쪽의 오랑캐라 칭하는 중국이라는 국호는 앞으로 안써주셨으면합니다.
원래 지나支那란 진시황의 진나라 진(秦)’의 음 [chi’n]이 전와(轉訛)하여 서방 제국에 치나(Cina) ·틴(Thin)으로 전해졌습니다.
그리고 지나支那란 용어에는 배달 한겨레의 갈래민족 지류란 뜻이 함께 담겨있습니다
中 “백두산은 중국문화 중요 발원지”
동아일보 / 기사입력 2007-07-25 02:56
“중국정부 차원의 동북공정을 이어받아 랴오닝(遼寧) 성의 ‘요하문명론’과 지린(吉林) 성의 ‘장백산문화론’이 한국사(史) 공략의 좌우 협공을 펼치고 있다.”
고구려사 전공자로 중국 동북공정을 비판해온 조법종 우석대 교수가 27일 서울역사박물관 강당에서 열리는 백산학회 학술대회에서 발표할 논문 ‘장백산문화론의 비판적 검토’에서 이 같은 맥락의 분석을 제기했다.
장백산문화론은 중국이 백두산(장백산) 일대 개발을 추진 중인 ‘백두산공정’을 역사·문화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내세우는 논거다. 요하문명론은 동호-숙신-예맥을 아우르는 고대 문명을 중국사로 편입하려는 시도이다.
조 교수는 2000년 결성된 지린 성 장백산문화연구회가 주도하는 이 문화론이 백두산을 ‘중국문화의 중요한 발원지’로 규정해 부여-고구려-발해의 역사를 흡수하는 작업의 핵이라고 지적했다. 이들의 장백산문화권은 랴오닝 지린 헤이룽장(黑龍江) 성 등 동북3성을 넘어 네이멍구(內蒙古) 동부, 극동 러시아와 한반도 북부를 포함한다. 종족 구성도 후대에 등장한 여진족을 중심에 놓고 고대 한국사를 흡수하려는 책략을 펼치고 있다.
이들은 이 문화권의 4대 종족으로 여진계 숙신, 한국계 예맥, 몽고·거란계 동호에 한족계인 화하를 덧붙이는 ‘물타기’를 펼친다. 그러면서 숙신-읍루-물길-여진-만주로 이어지는 여진계를 이 문화권의 토착 중심족으로 규정하고, 그 주요 정권은 부여-고구려-발해-대금-후금-청으로 못 박고 있다. 고조선-부여-고구려-발해 등 고대 한국계의 역사를 후대 금청(金淸)의 역사로 종속시킨 뒤 중화민족의 역사로 환치하려는 것이다.
백두산의 이름도 한반도계 백두산만 빼놓고 불함산(숙신·읍루)-개마대산(고구려)-도태산(남북조)-태백산(당대)-장백산(요·금 이후)으로 이어진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장백산이란 이름은 요 성종 통화 30년(1012년) 때 여진족 관련 기록에서 처음 등장하는 반면 한국 사료에서 백두산은 고려 태조 왕건의 5대조인 호경의 출원지를 백두산으로 명기한 데서 나온다.
조 교수는 특히 ‘삼국유사’의 신라 신문왕-성덕왕대(8세기) 기록 등 2곳에서 “오대산은 백두산의 대맥(大脈)·근맥(根脈)”이란 기록을 함께 제시해 백두산이란 우리 이름이 중국의 장백산보다 최소 300년 앞섰다고 강조했다.
조 교수는 읍루는 부여에 속했고, 여진과 만주의 전신인 말갈은 고구려-발해의 일원으로 한민족과 동일운명 공동체였으며 후대의 여진-만주도 중국보다 고려-조선과 더 밀접한 연관성을 지녔다고 반박했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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