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삼성그룹의 창업스토리

야국화 2015. 11. 11. 14:18

삼성그룹의 창업스토리

    

같은 면에서 재벌 4명 탄생

 

호암 이병철 삼성그룹 전 회장은 우리나라가 일본에 강제 합병당한 해인 1910년 2월 12일 경상남도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에서 아버지 이찬우 씨와 어머니 안동 권씨 사이에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가정은 아버지가 한 해 1.000섬을 거둬드릴 정도로 부유했다. 이병철 회장에게는 형 이병각씨와 두 누이가 있었으며 형 이병각씨는 아이스케기로 유명한 삼강하드를 차린 분이다. 삼강하드는 롯데그룹으로 넘어가 오늘날 롯데삼강이 되었다.

 

호암의 둘째 누님은 지수면의 김해 허씨 집안으로 시집갔다. 지수면은 오늘날 GS그룹을 탄생시킨 허씨 명문가이다. 허씨 문중을 한 해 3만7천석을 거두어들이는 대토호의 집안이다. 지수면은 농토가 넓고 땅이 윤택해 천석꾼이 10여명, 만석꾼이 두 집이나 나왔다. 지수면은 한국을 좌지우지 할 정도의 부자들이 많이 나와 오늘날 이 곳을 찾는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을 정도이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삼성그룹 이병철씨, LG그룹을 만든 구인회씨, GS그룹의 허만정, 허준구 부자, 효성그룹을 창업한 조홍제씨가 있다.

 

첫창 업은 정미업

선친으로 부터 창업 자금을 받은 그는 고향에서 가까운 마산에 도정공장이 부족하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그 곳으로 가 정미사업을 하기로 한다. 그렇지만 일본인 정미소 만큼 큰 규모로 차리기에는 자금이 부족하자 집안끼리 잘 아는 정현용씨와 고향이 같은 박정원씨를 만나 같이 사업을 하자고 제의해서 동의를 이끌어낸 뒤 1만원씩을 출자하고, 식산은행(1018년에 일본정부가 설립한 특수 은행으로 일제 강점기에 일본이 조선을 수탈하는데 기여한 금융기관으로 독립 후 산업은행이 됨) 마산 지점에서 융자를 받아 정미소를 지었다.

융자를 받기 위해 마산 지점을 찾아 지점장을 대면하게 된다. 이병철은 집에 토지가 많고 사업계획도 잘 다듬었으므로 대출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으로 내심 믿었다. 그러나 히라다 지점장은 까다로운 질문을 한다.

"곡물 가격이 변동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일본 곡물 시장 변화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

"사업가적 자질이 있는가"

등 예상치 않은 질문을 퍼부었다. 이병철은 불쾌하지만 참고 대답했다. 대답을 들은 지점장은 웃으며 말했다.

"조사 후에 조건만 맞으면 융자해 주겠다."

융자는 곧 이루어져 정미소 사업은 시작되었다.

그러나 1년 지나 결산해 보니 자본금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2만원이 잠식되었다. 그 원인은 이랬다. 쌀값이 비쌀 때 쌀을 사다가 도정을 해서 쌀값이 떨어졌을 때 내다 판 것이다. 쌀 때 사서 비쌀 때 팔아야 하는데 정반대로 장사를 한 것이다. 그래서 다음 해는 반대로 사고 판 결과 3만원의 자본금을 빼고도 2만원의 이익이 발생했다. 정미소가 제대로 돌아가자 이병철은 운수사업에 손을 댄다.

 

이병철은 일본인이 10대를 갖고 운영하던 자동차회사를 인수하여 새로 10대를 사서 모두 20대로 운수회사를 차렸다. 

도정사업과 운수사업이 순조롭게 돌아가자 이병철은 이른바 땅투기 사업을 착수했다. 은행 이자가 싸다는 것에 착안해서 돈을 빌려 논을 사서 소작을 주면 200평 한 마지기에서 소작료로 15원이 들어와 은행이자 3원 50전, 세금 1원, 관리비 50전을 빼고도 10원 이익이 나왔다. 은행에서 돈을 빌려 땅을 사면 앉아서 돈이 굴러 들어오는 장사다. 그래서 이병철은 한 해 동안 무려 200만평의 농토를 소유하는 대 지주가 되었다.

 

또 땅을 더 사려고 하는데 중일전쟁이 터졌다. 일본 정부는 은행 대출을 전면 중단하고 그동안 빌려준 돈을 모두 회수하라고 은행에 명령했다. 이런 비상조치가 내려지자 모든 거래가 중단되는 파국을 맞는다. 은행 빚을 갚으려고 땅을 팔려는 사람은 있어도 사려는 사람은 없자 전답 시세는 폭락했다. 이병철은 논밭을 아주 싸게 팔 수 밖에 없었다. 농토를 전부 팔아도 모자라자 정미소와 운수회사 모두를 팔아 은행 돈을 갚았다. 이를 경험한 이병철은 3이(利)가 있으면 3해(害)가 있다고 그의 자전(自傳)에서 술회하고 있다. 세 가지 좋은 일이 생기면 3가지 나쁜 일이 생긴다는 뜻이다. 이병철은 인생의 첫 사업에서 모두 실패했다. 

 

실패를 딛고 일어서려던 이병철은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기 위해 중국 여행길에 오른다. 장춘 봉천 베이징을 거쳐 상해에 도착한다. 그는 여행을 하면서 중국시장이 엄청나게 크다는 것을 알았다. 조선시장에서는 고작 몇 천원, 몇 백원하는 단위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는데 상해에서는 수십,수백만원이 왔다갔다 했다. 이병철은 만주에는 사과와 건어물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나라 경북의 특산물인 사과와 동해안의 어물들을 만주지방에 수출하면 큰 돈을 벌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확실히 사업가다. 얼마동안 여행에서 이러한 사업을 찾아내는 것을 보면 뛰어난 사업가임이 틀림없다.

그는 귀국해서 중국에 팔 사과의 작황과 동해안의 어획량을 조사했다. 작황이 안좋을 때 급등한 요소가 있는지, 물건을 필요한 양만큼 공급할 수 있는지를 철저하게 조사했다. 이병철은 1938년 대구 서문시장에 자본금 3만원으로 삼성상회를 차렸다.  

 

삼성 상호의 삼(三)의 의미  

삼성상회는 오늘 날 삼성 그룹의 모체가 된다. 이름을 삼성이라 지은 것은 숫자로 3이 크고 많고, 강한 것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한국인이 숫자 3을 좋아하는 이유는 쓰러지지 않는 숫자로 인식되고 있다는데서 착안한 것이다. 예컨대 화로나 삼발이가 달려있는 모든 기구는 쓰러지지 않는 특징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대기업들도 3을 선호한다. 미쓰비시 그룹을 한문으로 쓰면 삼릉(三菱)이다. 뒷글 릉은 바늘, 꽃과의 1년생 식물로, 미쓰비시 그룹 창업자 이와사키가의 가문을 상징하는 문장이었던 세 개의 마름에서 따온 것이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대기업이자 미쓰비시와 양대 산맥을 이루는 미쓰이도 삼정(三丼) 이라고 쓴다. 미쓰비시 창업자 고향 마을에 3개의 우물이 있어 고향을 생각하며 작명한 상호라 한다. 

이렇게 해서 대구에서 생산되는 청과류와 포항의 건어물을 중국으로 수출하기 시작했다. 또 무역업 외에도 제분기와 제면기를 설치해 국수제조도 겸했다. 이병철은 과거의 실패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열심히 일했다. 과일의 작황이나 어류의 물량 확보에 끊임없이 관심을 가지고 조사 분석을 하여 가격이 오르거나 내릴 때에도 당황하지 않고 거래량을 늘려 나갔다. 자금도 여유가 있자 이병철은 또 다른 사업을 찾기 시작했다. 사업을 물색 중에 양조장이 매물로 나온 것을 알고 이를 인수했다. 양조장은 당시 허가 받기가 힘들어 허가증만 가지고 있어도 돈이 되는 사업이었다.  

 

본격적인 무역업체 차려

1945년 해방이 되자 이병철은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 종로 2가 영보빌딩 2층에 "삼성물산공사"라는 회사를 세웠다. 중국인들이 '공사'라는 상호를 좋아해서 삼성물산공사라 칭한 것이다. 홍콩에 오징어, 한천 등을 수출하고 면사를 수입하는 본격적인 무역을 시작한다. 사업 시작 1년 반 만인 1950년 3월 결산에서 1억 2000만원원의 순이익을 기록했다. 그러나 석 달이 채 지나지 않아 6.25가 발발하여 북괴군이 삼성물산공사가 보유한 인천과 용산의 보세창고에 보관 중인 수입 상품을 몽땅 압수당했다. 빈 몸이 된 이병철은 할 수 없이 피난 겸 대구로 내려간다.

대구에 오니 조선양조장을 관리해온 사장이 3억원의 돈을 내 놓았다. 그는 임시 수도인 부산으로 가서 또 다시 사업을 물색했다. 이번에는 무역이 아닌 제조업 쪽에서 업종을 찾아 나섰다.

우리나라에는 100% 수입에만 의존하는 품목이 많았다. 그 가운데에 설탕, 종이, 페니실린을 생산하기 위한 공장 건설비용과 설비비용을 산출해 달라고 일본 미쓰비시 물산에 의뢰한다. 세 품목 중에 수요가 많은 설탕을 택했다. 막상 공장 건설을 하려면 일본인 기술진이 한국에 와야 하는데 이승만 대통령의 일본 배제정책으로 입국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플랜트만 수입하고 국내 기술진 힘으로 건설키로 한다. 공장 기계 조립을 하면서 모르는 것은 국제전화와 편지로 주고 받으면서 마침내 공장 건설을 끝낸 것은 1953년 11월. 노력한 보람이 있어 연건평 800평에 하루 25톤 생산 규모를 갖추었다. 제일제당이 설탕을 생산하면서 수입의존도가 1954년에는 51%로 떨어졌고 56년에는 7%로 급강하했다. 

 

이병철은 설탕공장안에 제분공장을 세운다. 제분공장은 6개월만에 공장설비를 모두 국산으로 완공시켰다. 그의 생애 처음으로 가장 근대적인 공장을 설립한 것이다. 제당공장이 제대로 돌아가자 그는 세 사업에 착수한다. 그것은 모직공장이다. 미국과 일본에서 성공한 순모사업을 국산화하면 틀림없이 성공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는 미국의 유명 모직 업체가 미대사관을 통해 자사 설비를 쓰도록 압력을 넣었으나 이를 물리치고 독일 스핀바우사에서 설비를 들여오기로 결정했다. 그는 불굴의 의지로 어려운 모직공장 건설을 마치고 1956년 2월 모직제품을 생산하기에 이른다. 제일모직은 창립된 지 3년 만인 1958년에 흑자를 내었다.  

 

이 전 회장은 4.19 혁명과 5.16 사태이후 굴절의 인생 행로를 걷는다. 4. 19 혁명 당시 삼성 산하 15개 기업체가 탈세 혐의로 조사를 받고 5. 16 쿠데타 당시 부정축재자로 몰린다. 이 전 회장은 1963년 한국일보에 기고한 <우리가 잘 사는 길>이라는 기고글에서 "문제(부정축재 처리)의 근원은 과거의 악명 높은 불합리한 경제적 현실을 무시했던 세제에 있다"며 "불합리한 세제하에서 몇몇 기업인들은 부득이 탈세는 하였을 망정, 기업을 창립, 확장하여 방대한 공장을 건설하고...(중략)...제품 수입에서 오는 막대한 외화를 절약하였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제 3공화국 출범하면서 이병철 전 회장은 박정희 대통령으로 부터 농약공장과 비료공장을 건설해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하지만 비료공장을 건설하려다 자금 조달이 어려워 포기한 일이 있는 그는 선듯 받아드리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머뭇거리자 박 대통령은

" 이 사장은 우리에게 협조할 생각이 없느냐" 고 다그쳤다.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역부족일 뿐입니다."

그 대답을 들은 박 대통령은 즉각 장기영 부총리를 부른다.

"이 사장이 비료공장을 짓기로 했습니다. 장 장관이 전적으로 책임을 지고 뒷받침 하십시오."

하지만 이병철은 과거 정권 시절에 추진하다 그만 둔 일이 있어 선듯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러자 장 부총리는 시도 때도 없이 전화를 걸어 비료공장을 건설하라고 재촉했다.  

 

그는 비료공장 건설은 개인사업이 아니라 그가 갖고 있은 '사업보국' 이라는 생각에서 건설을 하기로 결심하고 건설에 착수한다. 어차피 건설하려면 세계 최대 공장을 건설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수립한다. 연산 36만톤 이라는 거대한 공장 건설을 세우기로 마음을 정한다.

1964년 8월 한국비료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들여온다. 공장 부지는 울산 공업단지내에 35만평을 사들인다. 비료공장을 착공한지 1년만에 공정의 80%로 머지 않아 완공에 단계에서 뜻밖의 일이 생겼다.

당시 이병철은 일본 도쿄에서 기계 선적을 독려하고 있었는데 서울에서 연락이 왔다. 보세창고에 있던 OSTA라는 약품이 정부의 허가 없이 시중에 매각되어 큰 소동이 났다는 것이다. 그는 급거 귀국한다. OSTA란 일종의 사카린이다. 이것은 특수약품으로 요소비료 제조공정의 하나인 탄산가스 흡수 및 재생과정에 쓰이는 물질이라고 한다. 신문에 대재벌이 밀수를 했다고 대서특필 되었다.

 

이에 대해 이병철 전 회장은 "OTSA 문제가 일사부재리의 원칙도 무시한 채 강제수사를 받게 되었던 배경에는 몇몇 정치인의 공작이 숨어 있었다는 사실"이라며 "현재로서는 이름을 굳이 밝히지 않으나 장차 그 진상이 밝혀질 날이 있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당시 권력구조의 중추에 있던 인물이 OTSA 문제가 일어나기 전에 '한국비료 주식의 30% 증여'를 요구해 왔었던 사실도 있다"고 폭로했다. 한비 사태로 인해 이 전 회장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한국비료의 51% 지분을 정부에 기부하게 되고 경제계 은퇴 선언을 발표한다.

정치의 쓴 맛을 본 이 전 회장이 택한 사업은 매스컴 사업이었다. 이 회장이 매스컴 사업에 시작한 것은 "경제인의 힘의 미약함과 그 한계를 통감"했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는 "올바른 정치를 권장하고 나쁜 정치를 못하도록 하며, 정치보다도 더 강한 힘으로 사회의 조화와 안정에도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하고 생각한 끝에 결국 종합 매스컴의 창설을 결심했다"고 밝혔다.

 

전자사업 진출

잠시 신규 사업에서 손을 떼었던 이병철은 전자산업에 진출키로 했다. 삼성이 전자산업에 진출하려하자 기존 메이커들이 강력하게 반대했다. 정부는 여론에 밀려서 인지 삼성의 전자산업 허가요청에 묵묵부답이었다. 이병철은 박정희 대통령을 찾아가 전자산업은 한국을 먹여 살릴 국가적 대사업이라고 설득한다. 박 대통령도 이에 동의, 전자산업 시장을 전면 개방하라고 지시한다.

1969년 1월 일본 산요전기와 합작하여 삼성 산요전기를 설립한다. 그 후 1977년과 1983년 산요전기 측에서 삼성산요전기와 삼성전자부품의 지분을 모두 넘겨 받는다. 삼성전자는 창립 9년만인 1978년 흑백 TV 200만대를 생산하여 일본의 마쓰시다를 제치고 연간생산 세계 최대 기업이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반대로 컬러 TV 생산과 방송이 불허되는 바람에 컬러 TV 생산을 하지 못하던 삼성전자는 전두환 정권이 1980년 하반기에 컬러 TV 생산과 방송을 허가하자 본격적으로 생산하는 동시에 VTR, 음향기기, 냉장고, 냉난방기기, 전자렌지 등 각 분야에서 세계 정상이 되기 위해서 기술개발에 온힘을 쏟았다. 이병철은 전자산업에 대한 정부 간섭과 억제만 없었다면 우리나라 전자산업은 3-5년 가량 앞서 나갔을 것이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삼성 1985년 12월 노트북의 화면이나 휴대폰 화면 고화질 TV의 화면을 만드는 LCD 제품을 생산하기 시작한다. 한국이 오늘 날 전 세계 LCD 분야에서 1등을 석권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무렵 기술개발이 엄청난 속도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전자산업 분야에서 발판을 굳힌 삼성은 이어서 중화학공업분야로 진출한다. 제일 먼저 착수한 것이 조선이다. 조선산업의 본거지는 영국이었지만 일본이 그 기술을 도입하여 70년대에는 세계 최대의 조선국이 되었다. 19073년 5월 이병철.회장은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조선업계 명문인 IHI의 다구치 회장을 만났다. 기술제공을 부탁하기 위해서다.

"한국, 대만, 필리핀 등의 회사에서 제휴교섭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모두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삼성이면 가능하다고 보기에 현지를 한 번 보고 결정합시다."

 

삼성은 경남 통영군 안정리에 150만평의 부지를 확보한 다음 그 곳을 보여 주었다. 타구치 회장은 현지를 답사하고 나서 50대 50합작으로 조선소 건설을 제의했고, 이병철 회장이 그에 동의한다. 조선소 건설이 쉽게 이루어지는 것 같더니 며칠 후 뜻밖의 일이 생겼다. 오일 쇼크가 터지면서 세계 조선 업게는 신규 주문이 끊어지고 계약금을 포기하면서 주문을 취소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이런 사태 속에서 조선소 건설은 어려워질 수 밖에 없었다. 그 때 정부와 은행에서 오일 쇼크로 어려움에 부딪친 중형조선소가 있다며 삼성이 인수해 줄 것을 요청해 왔다. 이 회장은 부지 76만평에 종업원 3,500명 규모인 이 회사를 인수하기로 결정한다. 이것이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이다.

 

삼성과 일본의 IHI는 다시 중공업에 착수하기 위한 합작을 맺는다. 이병철 회장은 중공업공장 건설계획을 1단계와 2단계로 나누었다. 1단계는 강제처리 능력 8만 5,000톤 규모로 추진하기로 한다. 공장부지는 경남 창원의 기계공업단지 내에 확보한다.

1978년 6월 제1기 공장이 완공되고 당시 단일 규모로는 서독의 크루페사 다음가는 규모였다. 여기서 수송용 기계,대형 보일러, 레미콘, 크레인 공해 방지시설, 교냉 등을 생산했다.

 

1986년에는 두 번째 공장을 건설한다. 그즈음 창원단지내 모든 공장이 적자를 내고 있었고 삼성중공업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병철 회장은 이런 적자는 운영상의 문제도 도사리고 있을 것으로 보고 경영합리화 과정을 거쳐 어느 정도 경영이 정상화되었다. 이어서 한국중공업의 중장비 공장을 인수한다. 한국중공업 중장비 부문은 소품종 대량 생산형의 시설을 갖추고 있어 그 공장 인수 후에 공장을 재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이 회장은 많은 투자가 필요한 석유화학사업에도 진출했다. 그는 기술 제휴선으로 미국의 다모코, 일본의 미쓰이 석유화학을 선택한다. 하지만 마모코가 선듯 제휴를 하지 않자 2년 동안 디모크의 모기업인 스탠더드 오일의 회장을 꾸준히 만나 설득하여 마침내 1974년 가을 삼성석유화학을 탄생시킨다. 2년 후에는 첫 제품이 생산되고 경영합리화 노력에 힘입어 1983년에는 세계 유례가 없는 최고 이익을 낸다. 1987년에는 40만톤의 PTA를 생산. 국내수요의 90%를 충당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삼성의 대명사 반도체 사업 착수

이 회장은 18년 만에 미국을 방문한다. 새로운 사업을 찾기 위해서다. 지금까지 투자해온 설탕, 섬유, 모직 등 경공업은 개발도상국이 바짝 뒤따라오고 중화학공업은 선진국과 경쟁에서 밀려 있는 실정이었다. 삼성이 살길은 새로운 돌파구를 찾은 것 밖에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해답은 첨단기술이다. 그것은 반도체다. 하지만 반도체 생산을 위한 고급기술을 어디서 데려올 것이며 공장부지는 어디로 결정해야 할 것이며 막대한 투지자본은 어디서 조달할 것인가 등 숱한 과제가 그 앞에 놓여있었다.

 

이 회장은 1982년 10월 자신의 구상을 바탕으로 반도체, 컴퓨터 사업팀을 구성한다. 그리고 미국에서 고급 두뇌를 불러 모았다. 이윤우 개발실장을 미국에 보내 미국에 있는 반도체 전문가들과 협의해서 사업계획서를 작성하도록 지시한다. 그가 만들어 온 사업계획서는 다음과 같다. 1983년 초가을에 VLSI(초대규모집적회로) 양산공장 건설에 착수한다. 첨단기술의 확보와 판매를 위해 미국에 연구개발센터와 신제품 생산 설비를 갖춘 현지법인을 만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반도체사업에 경험을 가진 사업가들은 모두 그 사업에서 손을 떼라고 한다. 이 회장은 거의 모든 사업을 사장단에게 의논한 다음 사장단이 안된다고 판단하면 미련없이 사업을 포기한다고 했다.. 그러나 사장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유일하게 사업을 밀어 붙인 사업이 바로 반도체사업이다. 오늘의 삼성의 대명사가 된 삼성반도체는 이렇게 탄생되었다.

 

(자료 : 한국의 대표급 경영총수 비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