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사리암에 갔다가 청도 운문사를 들러서 잠깐 09.6.6

야국화 2009. 6. 7. 21:02

 오랜만에 청도 운문사를 다녀 왔어요

가랑비속에 사리암을 가볍게 들리고 구수한 된장국에 떡 2조각 먹고 내려오니 운문사엔 비가 그냥

 지나갔는지 깨끗하고 스님들의 바쁜 일상만 조금씩 엿보이더군요

 오랜만에 따라나선 길이지만 여유있는 맘이 생기더군요.

 낮은 담을 보면서 , 담으로 에쁘게 핀 꽃도 보고 , 간 김에 반야심경 반지도 하나사고, 108번뇌 팔찌도

 하나사고..... 주위를 둘러 보면서 그냥 막 찍었어요. 밧데리가 다되가서 대충 찍어도 경치가

 너무 좋았어요.

 하늘아래 먼 산의 바위들 .. 지붕위로 보이는 그 너머의 풍경들...넓은공간...

그냥 시원한 느낌을 맘에 담고 왔어요.

 맑은 날씨에 언젠가 겨울에 왔었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도 좋지만 겨울에도 좋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울밀선을 넘어면서 비록 멀미로 중간에 쉬었다가 왔지만. 와 보면 이렇게 좋은것을...

 하루기도를 올리고 스님들의 낭낭한 소리를 들으며...

 무릎이 닳도록 기도 하시던 싸리암의 신도들이 떠오릅니다.

 비록 실물은 나 혼자 즐기고 왔지만 ..나중에 다시 봐도 좋을것 같아요.

 더 나이들면 촌에 토방집을 짓고 이런담을 아주 낮게 두르고 야생화를 심고 싶네요.

 

 

 

 

 

운문사는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호거산에 있는 사찰로 대한 불교 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의 말사이다. 560년(신라 진흥왕 21)에 한 신승이 창건하였다. 608년 (진평왕 30)에 원광 국사가 제1차 중창하였다. 원광국사는 만년에 가슬갑사에 머물며 일생 좌우명을 묻는 귀산과 추항에게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주었다고 한다.

 

 

제2차 중창은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후삼국의 통일을 위해 왕건을 도왔던 보양(寶壤)이 오갑사(五岬寺)를 중창하였다. 943년 고려 태조 왕건은 보양의 공에 대한 보답으로 운문선사(雲門禪寺)라 사액하고 전지(田地) 500결을 하사하였다.

제3차 중창은 1105년(고려 숙종 10) 원응국사가 송나라에서 천태교관을 배운뒤 귀국하여 운문사에 들어와 중창하고 전국 제2의 선찰로 삼았다.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 때 당우 일부가 소실되었다.

 

1690년 (숙종 16) 설송(雪松)대사가 제4차 중창을 한 뒤 약간의 수보(修補)가 있어 왔다.

1835년 운악(雲岳)대사가 제5차 중창을 ,

1912년 긍파(肯坡)대사가 제6차 중창을 하였다.

1913년 고전(古典)선사가 제7차 수보하였고, 비구니 금광(金光)선사가 제8차 수보를 하였다.

1977에서 98년까지 명성스님이 주지로 있으면서 대웅보전과 범종루와 각 전각을 신축, 중수하는 등 경내의 면모를 한층 일신하였다.

현재는 30여 동의 전각이 있는 큰 사찰로서 규모를 갖추었다.

운문사는 1958년 불교정화운동 이후 비구니 전문강원이 개설되었고, 1987년 승가대학으로 개칭되어 승려 교육과 경전 연구기관으로 수많은 수도승을 배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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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리굴(邪離窟)은 운문산에 있는 네 곳의 굴 중 하나이다. 즉 동쪽은 사리굴(邪離窟), 남쪽은 호암굴(虎巖窟), 서쪽은 화방굴(火防窟), 북쪽은 묵방굴(墨房窟)로서 옛날에는 이 굴에서 쌀이 나왔는데 한 사람이 살면 한 사람 먹을 만틈의 쌀이, 두 사람이 살면 두 사람 몫의 쌀이 나왔다고 한다.

하루는 공양주 스님이 더 많은 쌀을 얻으려고 욕심을 내어 구멍을 넓히고 부터 쌀이 나오지 아니하고 물이 나오게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그 장소는 나반존자(那般尊者)상이 모셔진 바로 아래다.

아래에서 보면 왼쪽굴이 그곳이고 지나쳐보면 어딘지 분간이 가지 않을 곳으로 특별히 굴 같지는 않다. 운문사 사적에는 사리암은 고려초 보양국사(寶壤國師)가 930년에 초창하였고 조선 헌종 11년(1845)에 정암당(靜庵堂) 효원대사가 중창하였으며 1924년 증축, 1935년에 중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리암의 천태각(天台閣)은 일명 독성각(獨聖閣)이라고도 하며 조선 헌종 11년(1845)에 신파대사(新派大師)가 초창하여 나반존자상을 봉안하였다. 이 나반존자상의 후면에는 조선 철종 2년(1851)에 봉안한 독성탱화(獨聖撑畵)와 1965년에 경봉(鏡峰)화상이 점안한 산신탱화가 함께 봉안되어 있다. 천태각 밑에 있는 비석은 금호당화상(金虎堂和尙)이 세운 중수비이다. 1977년 비구니 혜은(慧隱)스님이 원주로 부임하여 1978년 전기불사를 시작으로 1980년에 전 부산 거림회 회장 이인희 거사의 후원으로 3층의 요사를 신축하였고 1983년 현재의 관음전, 자인실, 정랑 등을 개축하였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현존하는 건물은 위에서부터 천태각 그 뒤에 산신각이 아주 조그만하게 각각 한칸으로 지어져 있으며 천태각 왼쪽에 굴이 하나 있는데, 굴의 모양을 하고 있으나 사람이 그 굴에서 기도를 하게끔 돌로 바닥을 깔았다. 그 안쪽에 샘이 있어 물이 나오는 곳이 있는데 그곳이 그 옛날 쌀이 나오던 곳이라 한다. 그 한 계단 아래 관음전이 있고 관은전 좌측으로 한 계단 아래 자인실이 있으며 자인실 앞으로 계단을 따라 내려오면 왼편에 3층의 요사가 있다.

특이한 것은 이 요사의 지붕이 관음전 앞마당이다. 좁은 터의 활용을 최대화 했다고 봐야할 것이다. 또 그 왼편에 3층의 집이 하나 있으며 공양간 등 이곳도 요사로 쓰이고 있다. 이 건물이 부산 거사림 이인희 회장 등이 후원하여 건립된 요사인 것이다.

사리암은 입구 삭도가 있는 곳의 다리에서부터 약 1천보(계단포함) 정도 올라와서 층암절벽 위에 세워진 암자이다. 이곳 사리암은 국내에서도 이름있는 나반존자의 기도처로 신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나반존자는 석가여래께서 돌아가신 후 미륵불이 출현하기까지 부처님이 계시지 아니한 동안 중생을 제도하려는 원력을 세운 분으로 부처님의 부촉을 받고 항상 천태산상에서 선정을 닦으며 열반에 들지 않고 말세 중생의 복밭이 되어 미륵불을 기다리는 존자이다.

근래엔 사리암에 가려고 하면 운문사 뒤편에서 출입을 통재하고 있어 사리암 신도 외 일반인은 쉽게 들어갈 수 없다. 그런 이유로 운문사 계곡안 만은 심한 오염의 현 세태속에서도 아주 맑은 산천과 산골의 물고기 등을 볼 수가 있다. 이는 군에서 산의 휴식년제 실시로 인하여 사람의 출입을 통제하는 공이 크다고 할 것이다

사리암에 처음 가면 신기한 것을 볼 수가 있다. 사리암 맨 아래층에 다달으면 먼저 온 사람들이 아래를 내려다 보면서 손바닥에 땅콩을 올려놓고 깐돌아 깐돌아를 부른다. 깐돌이가 뭘까 조금 있으면 답이 나오는데 신기하게도 산새가 와서 손바닥 위에 있는 땅콩을 의심없이 물고 간다. 언제부터인지 이곳에 살고 있는 비구니 스님들이 길을 들여놓아서 이렇게 된 것이라는 것이다. 사람과 새와의 신뢰가 이루어 진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신도이건 등산객이건 식사때가 아니라도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간다. 그래도 스님들은 그것을 탓하지 않고 배고픈 사람은 요기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바로 이것이 무상보시며 중생을 사랑하는 마음인 것인가 보다. 공양을 마치고 아래를 내려다보면 언덕 아래에 비자나무가 바위 위에서 여러 그루 살고 있다. 오래되지 않은 날에 스님들이 심은 것이라 한다.

또한 조선 고종황제가 심열로 고생하던 중에 청우스님이 사리암에서 백일기도를 주관하였는데, 꿈에 선인이 나타나 임금님의 머리에 침을 꽂아주니 깨끗이 나았다는 효험담도 전해져 온다. 중생들에게 괴로움이 많아서인지 소원이 많아서인지 기도를 하기 위하여 곳곳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사리암은 나반존자 기도도량이다.